창작의 소재·대상·내용은 “지금 바로 여기의 것”
상태바
창작의 소재·대상·내용은 “지금 바로 여기의 것”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22 07: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① 창신(創新)의 미학②

[한정주=역사평론가] 오랜 세월 글의 전범(典範)처럼 전해져 온 경전(經典)과 문헌 속 옛글은 대개 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적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고문(古文)을 잘 모방하거나 혹은 고문과 비슷하게 글을 짓는 것을 사람들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박지원은 아무리 잘 지은 글이라고 해도 옛글을 모방하거나 옛글과 비슷한 것이라면, 그것은 가짜 글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러한 글에는 글을 쓰는 사람의 독창적인 정신과 의견이 담겨 있지 않을 뿐더러 진솔한 표현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옛글과 비슷하거나 혹은 옛글을 모방하는 가짜 글이 아닌 독창적인 정신과 진솔한 표현이 담긴 참된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박지원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옛 시대를 따르거나 옛것을 흉내 내려고 하지 말고 ‘지금 바로 여기의 것’을 글로 쓰는 것이다.

이때 박지원은 창신(創新) 즉 참신하고 창의적인 글쓰기의 좋은 사례로 이덕무를 거론한다.

당시 사람들은 옛글을 모방하거나 답습하지 않은 이서구를 두고 화를 내고 야단을 쳤던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덕무의 시작(詩作)에 대해서도 옛 시와 비슷하지 않을뿐더러 그 격식과 내용이 옛 시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 비루하고 보잘 것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옛 시’가 아닌 ‘오늘날의 시’라고 폄훼하며 평가절하하곤 했다.

“자패가 말했다. ‘비루하구나! 이덕무가 지은 시야말로. 옛사람의 시를 배웠건만 그 시와 비슷한 점을 볼 수 없구나. 이미 털끝만치도 비슷하지 않는데 어찌 그 소리가 비슷하겠는가? 거칠고 서툰 사람의 비루함에 안주하고, 오늘날의 자질구레하고 보잘 것 없는 풍속과 유행을 즐겨 읊는다. 지금의 시일 뿐 옛 시는 아니다.’” <박지원, 『연암집』, ‘영처고 서문(嬰處稿序)’>

한당(漢唐)과 송명(宋明), 곧 중국의 옛 시를 모범으로 삼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시를 짓지 않는 이덕무의 작품은 시라고 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난과 비방에 대해 박지원은 오히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했다”고 하였다.

그는 옛날이란 ‘그때의 지금’일 뿐이라면서 옛 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야말로 비난받아야 할 일이라고 지적한다. 옛것도 당시에는 하나의 ‘지금’일 따름이다. 이덕무 또한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라는 제목의 수상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금(古今)도 눈 한 번 깜짝하거나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순간이다. 눈 한 번 깜짝하거나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순간도 조그만 고금(古今)이다. 눈 한 번 깜짝하거나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순간도 쌓이면 쉽사리 고금(古今)이 된다. 또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번갈아 돌아가지만 새롭고 다시 새로울 뿐이다. 이 가운데서 태어나고, 이 가운데서 늙어간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3일에 유념한다”라고.

여기에서 3일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비유한 표현이다. 다시 시간의 개념에서 보자면 과거에 살았던 사람에게 그때는 ‘과거의 지금’이고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그때는 ‘오늘의 지금’이며 미래를 살 사람에게 그때는 ‘미래의 지금’이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에 살았던 사람이든,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이든, 미래에 살아갈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창작의 소재와 대상과 내용이 되는 것은 ‘지금 바로 여기의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만약 지금 당신이 자신의 어린 시절 예를 들어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글을 쓰고 있다면 당신은 1970년대의 어느 시기, 즉 ‘과거의 지금’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10년 후 미래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면 당신은 2025년의 어느 시점, 즉 ‘미래의 지금’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쓴 이 글은 내일이 지나면 어제라는 ‘과거의 지금’에서 내가 쓴 글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 바로 여기’라는 시점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한다.

“나는 자패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이것이 이덕무의 시에서 볼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로 말미암아 지금을 보면 진실로 비루하다. 그러나 옛 사람도 자신을 볼 때 반드시 자신은 옛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에 그 옛 사람의 시를 본 옛 사람 역시 그때는 한 명의 지금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세월이 도도히 흘러가는 것에 따라 풍요(風謠)도 여러 차례 변하였다.

아침에 술 마시던 사람이 저녁에는 세상을 떠나 과거의 사람이 되어 있다. 천만 년 동안 이것을 따라 옛날이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것은 ‘옛날’과 대비하여 이르는 말이다. ‘비슷하다’는 것은 모름지기 ‘저것’과 비교하여 쓰는 말이다. 대개 ‘비슷하다’는 말은 비슷한 것일 뿐이니, 저것은 저것일 따름이다. 이것은 저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이 저것이 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종이가 흰 색이라고 해서 먹이 흰 색이 되지는 않는다. 초상화가 아무리 사람과 비슷하다고 해도 그림은 말을 할 수 없다.

기우제를 지내는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洞)에 청기와로 지은 사당이 있다. 그 사당 안에 얼굴이 붉고 긴 수염이 엄숙한 사람이 모셔져 있다. 바로 관우(關羽)이다. 학질을 앓고 있는 남자나 여자를 그 좌상 아래로 들어가게 하면 귀신을 본 듯 놀라고 혼백이 달아나 추위에 덜덜 떠는 증상이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위엄 있고 존귀한 소상(塑像)에 무례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소상의 눈동자를 후벼 보아도 눈도 깜짝이지 않다. 코를 쑤셔 보아도 재채기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진흙 인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수박의 겉만 핥은 사람이나 후추를 통째로 삼킨 사람과는 수박과 후추의 맛을 논할 수 없고, 이웃 사람의 담비 털로 만든 갖옷이 부러워 무더운 여름에 빌려 입는 사람과는 계절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가짜 진흙 인형에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히고 높은 관을 씌워보았자 진실하고 솔직한 어린아이는 속일 수 없다.

대개 시대와 풍속을 걱정하고 마음 아파한 사람을 꼽는다면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굴원(屈原)만 한 사람이 없다. 초나라의 풍속은 귀신을 숭상했다. 이에 그는 ‘구가(九歌)’를 지었다.

한(漢)나라는 진(秦)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진나라의 옛터에 의거하여 그 영토에서 황제가 되었고, 그 성읍(城邑)에다 도읍지를 정했다. 더욱이 진나라의 백성을 한나라의 백성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그 법제도에 있어서는 진나라의 법을 답습하지 않고 새롭게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만들었다.” <박지원,『연암집』, ‘영처고 서문’>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