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弘齋) 정조 이산① “군자는 도량이 넓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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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弘齋) 정조 이산① “군자는 도량이 넓어야 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24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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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㉜
▲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에 실린 세손 시절의 정조 어진.

[한정주=역사평론가] 한 가지 궁금증과 질문으로 글을 시작해보겠다.

조선의 선비들처럼 임금도 호(號)가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유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임금은 제왕인 동시에 한 사람의 유학자였기 때문에 호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선비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역대 임금의 호에 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인조(仁祖)는 송창(松窓), 효종(孝宗)은 죽오(竹吾), 영조(英祖)는 양성헌(養性軒), 순조(純祖)는 순재(純齋), 헌종(憲宗)은 원헌(元軒), 고종(高宗)은 성헌(誠軒) 등의 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일찍이 호학군주였던 정조(正祖)만큼 스스로 다양한 호를 지어 자신의 뜻과 철학을 세상에 드러낸 제왕은 없었다.

홍재(弘齋),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 등 정조가 남긴 호는 다른 어떤 선비들의 호보다 독특하고 다채롭다.

더욱이 이 호들을 사용했던 시기를 살펴보면 왕세손과 임금으로서의 그의 삶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판도까지 읽을 수 있다.

정조는 임금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학자에서 찾았던 사람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임금으로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호를 남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호에 담겨 있는 정조의 삶과 뜻을 찾아 떠나보자.

정조가 가장 먼저 사용한 호는 왕세손 시절 자신이 거처하던 동궁의 연침(燕寢)에 이름 붙인 ‘홍재(弘齋)’였다. 홍재는 『논어(論語)』 ‘태백(泰伯)’ 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다.

“증자왈(曾子曰) 사불가이불홍의(士不可以不弘毅)니 임중이도원(任重而道遠)이니라. 인이위기임(仁以爲己任)이니 불역중호(不亦重乎)아 사이후이(死而後已)니 불역원호(不亦遠乎)아!”

(증자가 말하였다. ‘선비는 가히 도량(度量)이 넓고 마음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맡은 소임이 중대(重大)하고 나아갈 길은 원대(遠大)하기 때문이다. 어진 것으로써 자신의 소임을 삼으니, 이 또한 중대하지 아니한가. 죽은 다음에야 그치니, 이 또한 원대하지 아니한가.’)

정조는 증자가 선비가 갖추어야 할 자질로 언급한 ‘홍(弘)’과 ‘의(毅)’ 중 홍(弘)을 취해 자신의 생애 첫 호로 삼았다.

여기에서 홍(弘)은 ‘관대하다 혹은 넓다’는 뜻으로 도량이 넓은 것을 말하고 의(毅)는 ‘굳세다’는 뜻으로 마음이 굳센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홍(弘)’자를 취했다는 것은 정조가 장차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로 마음이 굳센 것보다는 도량이 넓은 것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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