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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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 아프리카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5.04.24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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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철 지붕이 대부분인 주택들 사이로 모자간으로 보이는 이들이 나들이를 하고 있다.

에이즈와 말라리아, 황열 등의 풍토병이 난무하는 버려진 땅. 온갖 사나운 맹수들이 호시탐탐 인간의 피 냄새를 그리워하는 곳.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검은 피부에 하얀 눈자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마치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흑인들에 대해서도 선입견을 앞세운 시선으로 터부시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도착한 첫날 일행을 맞이한, 10년째 살고 있다는 김충학 사장의 말은 전혀 달랐다.

“6개월만 이곳에서 살아봐라. 결코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10일 동안의 짧은 아프리카 여행에서 김 사장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그 무엇도, 전혀 새로운 것도 하나 없었지만 토니 베넷의 노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처럼 아프리카는 내 마음을 두고 오기에 충분했다.

새로운 광경에 놀라 탄성을 지르고, 거대한 자연의 힘에 눌려 위압당했던 세계 여러 여행지에서의 기억과는 달리 아프리카는 거울 앞에서 나 자신을 비춰보는 숙연함만이 계속됐다.

▲ 마사이족 아낙네들이 화려하게 물들인 각종 천들을 시장 입구의 길가에 펼쳐놓고 판매하고 있다. 이들은 유독 붉은 색의 천을 선호했다.

후진국을 여행할 때면 으레 겪는 일 가운데 하나가 뒷돈이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30시간 만에 도착한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하던 일행 가운데 몇 명이 이민국 직원들에 의해 입국이 제지됐다. 황열 접종을 하지 않아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아프리카를 자주 드나들었던 김정규 A&A투어 사장이 이민국 직원들과 짧은 시간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일행 모두가 공항을 빠져나왔다. 20달러의 뒷돈을 집어줬단다.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 위치한 케냐는 한국의 1950~1960년대를 연상케 하는 빈민국이다.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이 그렇듯이 케냐 역시 원조로 나라의 살림 대부분을 이끌어가고 있다.

국토의 중앙부를 적도가 통과하고, 남으로는 인도양과 탄자니아, 동으로는 소말리아, 북으로는 에티오피아, 서로는 우간다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인구 3000여만 명에 한반도의 3배에 달하는 면적이지만 수도 나이로비와 몸바사, 나쿠르, 키수무 등 일부 도시를 제외하곤 개발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은 촌락과도 같은 도시가 대부분이다.

빈곤국들의 공통점으로 꼽히는 관료사회의 부패는 이 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현직 교통부 장관이 나이로비에서 대표적인 골프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정치인과 관료들은 대저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반면 대다수 국민들은 높은 실업률과 저임금에 굶주리며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 버둥거린다.

다만 이들은 더운 지방 특유의 여유로움이 우리와 다를 뿐이다. 굳이 직장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고, 또 해고를 당한다 해도 먹고 살 걱정 때문에 구차해질 이유가 없다.

세 번의 비행기를 갈아타고 30시간 만에 케냐에 입국한 일행은 다시 자동차로 6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 장이 서면 가장 신나는 구경거리는 역시 차력사를 앞세운 약장수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풍경들. 정말 아프리카에 와 있는가 싶을 만큼 낯익은 모습들이 바람소리와 함께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간다. 어린 시절 고향의 풍경 혹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조그만 마을 한 가운데에 와 있는 듯하다.

인간의 머리는 무엇 하나를 접하게 되면 다른 무엇과 대비시키는 버릇이 있는가 보다.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지금 내가 여행 중인 이 나라, 이 도시의 모습을 자꾸 비교하며 바라보게 된다.

물론 기준은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 기준에 따라 모든 사물들을 재단해 버린다. 기준이 옳은 것이지, 아니면 그른 것인지에 대한 판단도 하지 않은 채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을 갖게 된다.

이름 모를 거대한 가로수가 길게 뻗어있는 거친 도로가를 한가롭게 걸어가고 있는 검은 피부의 낯선 사람들이 시야에 잡힌다. 여자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 가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참새 떼 마냥 길가에 나란히 줄지어 앉아있는 젊은 남자들의 모습 역시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마을로 가면 영락없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노인정 앞에 앉아 장기를 두는 한국의 시골 풍경과 다르지 않다.

▲ 세렝게티로 가는 길에서 만난 마사이족 형제.

그러나 그들은 나무 그늘 밑에 옹기종이 앉아 두런대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도로를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지나가는 차량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붉은 원색의 천을 온몸에 두르고 지팡이를 하나씩 손에 쥐고 있는 게 특이하다. 얼핏 보아도 그리 늙은 사람들은 아니다.

동부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부족인 마사이족이다. 이들의 가족제도는 일부다처제다. 소 몇 마리에 혹은 양 몇 마리에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를 판단해 여성들이 매매되는 결혼제도가 아직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렇게 시집을 온 여인들은 자신이 거주하게 될 집을 지어야 하고, 아이들을 양육해야 한다. 그리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또 많은 딸을 낳아야 한다. 장성한 딸이 소 혹은 양 몇 마리에 팔려 가면 재산도 그만큼 늘어난다. 곧 딸이 많으면 쉽게 부자가 된다는, 웃지 못 할 풍습이다. 물론 딸을 낳을 수 있는 아내가 많을수록 부자 되기는 쉽다.

반면 결혼을 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소 혹은 양이 없는 남자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아내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딸도 낳지 못하니 부자가 되기는 애시 당초 글러먹은 것이다.

남자들은 아내를 사오는 것으로 모든 역할이 끝난다. 하는 일도 없다. 그저 나무그늘에 앉아 할 일 없이 시간만 죽이면 그만이다. 소몰이와 양몰이는 어린 아들의 몫이고, 집안 살림과 생계는 아내의 몫이다.

버스가 잠깐 휴식을 위해 멈출 때면 온갖 원색의 천을 두른 여인들이 어김없이 나타나 갖가지 물건을 내보이며 가격을 부른다. 그들의 얼굴에 패인 고단함에는 집안 살림을 이끌어가야 하는 가장으로서, 한국 40~50대 남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아픔이 서려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말한다.

“한국 여자들 행복한 거야!”

▲ 1960~1970년대 우리의 공사현장을 보는 것 같았다.

이들의 한 달 생활비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생활비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먹는 것에 딱히 구애를 받지 않는 이들에게 생활비란 무의미하다. 직업이라는 것도 없다. 더운 지방 사람들이 그렇듯이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을 갖고 있지 않다. 오늘 벌어 오늘 먹는 이들에게 저축도 당연히 무의미하다.

그래도 우리 식으로 또 비교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교사들의 급여를 물어보았다. 케냐의 교육제도는 8-4제다. 2000년대 중반 의무교육으로 지정된 초등학교 과정 8년에 고등학교 과정이 4년이다.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한 달 급여는 미화 100달러. 최저생계비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라 한다.

김 사장이 운영하고 있는 여행사의 직원은 총 6명. 매니저에게 월 300달러를 지급하고 있단다. 최근 아프리카에 한국인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한국 사람을 고용하고 싶지만 6명에게 지급하는 급여보다 더 많은 임금을 줘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굳이 현지인을 고용하고 있다는 게 김 사장의 말이다.

케냐에 대한 설명이 계속되고 있는 사이 고속으로 달리던 자동차가 속력을 낮춘다. 창밖에서 남자 꼬마아이가 이방인들의 차를 보고 손을 흔든다. 목동이다.

소떼를 몰고 도로를 가로지르는 행렬을 자동차가 방해했는지, 아니면 자동차의 고속질주를 소떼가 방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꼬마아이는 먼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비단 이 꼬마아이 뿐만이 아니다. 아프리카 여행 내내 이방인의 사치스런 방문을 그들은 웃음과 손짓으로 반겨주었다. 어른아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결같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때론 자동차를 태워달라거나 혹은 물건을 사달라거나 혹은 아무런 요구 없이 환영의 뜻을 웃음과 손짓으로 표현해 냈다.

손을 흔드는 천진난만한 모습은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따뜻한 것이었다. 전혀 낯선 곳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왔는지도 모르는 이방인들이지만 적대감이나 경계감이 없다. 그저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방문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갑게 맞이할 뿐이라는 천연덕스러움이 그들의 얼굴에 피어있었다.

자동차는 수시로 속력을 높이다 줄이기를 반복했다. 소떼의 행렬과 마주치거나 마을로 진입할 때 혹은 마을을 빠져나올 때면 결코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속력이 줄었다.

듬성듬성 떨어진 마을 입구에는 고속방지 턱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게 솟구쳐 주행을 방해했다. 횡단보도가 없이 넘나드는 사람들을 자동차는 피해가야 했다. 아니 자동차보다 사람이 먼저 길을 건너야만이 자동차가 지나가는, 전자식 신호등보다 더 발달된 신호등이 이곳에는 존재했다.

수도 나이로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운타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신호등이 보이질 않았다. 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나 길을 건넜고 자동차는 아무 곳에서나 우회전을 했다(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 우회전을 하기 위해서는 중앙선을 넘어야 함).

그러나 사고는 없었다. 그렇다고 양보운전도 없었다. 서울보다 더 심한 끼어들기로 운전을 하고 있는 제임스보다 옆자리에 앉은 이방인이 오히려 짜증을 부렸다. 그래도 제임스는 웃는다.

꽤 규모가 있는 소도시로 자동차가 들어선다. 시끌시끌한 마이크 소리가 귀에 익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기압을 넣는 마이크 속의 목소리. 여기저기 손과 머리에 보따리를 들고 인 사람들이 모인다. 시골장터다.

▲ 들판 한 가운데에 판을 벌인 마사이족 노상시장.

다시 1960~1970년대의 모습을 떠올린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부부, 머리에 물건을 이고 가는 어머니와 딸, 장이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온갖 묘기를 보여주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다 결국에는 약병을 들어 보이며 만병통치약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약장수들.

이곳의 장터도 한국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시골 비포장도로를 따라 장보러 나선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그 풍경들이 오늘 아프리카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똑같은 하늘, 똑같은 대지. 그러나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르다. 사는 방식도 조금씩 다르다. 여행의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것을 느낀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잠재의식 속의 그 무언가를 꺼내게 된다.

이렇듯 아프리카는 나를 생각하게 한다. 어머니의 품 같은 포근함이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와 거울로 비춰준다.

그곳을 미개지로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눈일 뿐이다. 그들이 21세기를 살면서 19세기 혹은 18세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한들 그것은 우리의 기준이다.

세계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찾고 있다. 도로 건설, 학교 설립, 공장 설립, 동물 보호, 미개지 개척 등 온갖 명분을 들이대며 아프리카로 몰려들고 있다. 그러나 속셈은 다른 데에 있다.

사파리 자동차를 운전했던, 흑인 가수 밥 마린의 노래를 좋아했던 순진한 미소의 청년 마닝고는 이 같은 개발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본 사람들이 도로를 포장해 준다고 하지만 반갑지 않다. 도로가 포장되면 자동차는 그만큼 빨리 달릴 것이고, 사람들은 예전처럼 쉽게 도로를 건너지 못할 것이다. 자동차에 치여 죽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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