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弘齋) 정조 이산③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군사(君師) 자처한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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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弘齋) 정조 이산③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군사(君師) 자처한 제왕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30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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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㉜
▲ 정조의 어진. <수원 효행기념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렇다면 정조가 왕세손 시절 만천하가 알 수 있도록 ‘홍(弘)’자를 취해 자신의 호로 삼은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먼저 ‘홍재’라는 호를 통해 왕세손 정조는 훗날 자신이 왕위에 오르더라도 ‘넓은 도량’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정적을 대하겠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홍재’라는 왕세손 시절 정조의 호를 볼 때마다 진실과 가면이 혼재되어 있는 불안한 그의 내면 심리가 보인다.

아무리 정조가 성군(聖君)의 자질을 타고 났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끝없이 자신을 해치려고 음모를 꾸미는 정적들에게 넓은 도량만 품을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아직 인격적으로 완숙(完熟)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10대와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 때문에 필자의 눈에는 이 호가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쓴 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정적들에 둘러싸여 불안과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던 정조가 살아남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선택한 일종의 처세술로 보인다.

우리가 성군의 표상으로 여기는 정조는 학자 군주였지만 또한 왕세손 시절부터 예리한 안목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정치적 계책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던 노련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사실은 왕위에 오른 정조는 왕세손 시절 호에 새긴 ‘홍(弘)’자의 뜻처럼 넓은 도량으로 정적들을 상대했다는 점이다. 정조는 임금이 되자 가장 먼저 자신이 일찍이 노론 세력이 역적으로 몰아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음에도 예전에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왕실과 조정의 대신들을 몰살하다시피 한 연산군처럼 피의 복수를 가하지는 않았다.

물론 화완옹주,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 자신을 직접적으로 해치려고 모의한 역적들과 그 추종세력에 대해서는 일벌백계 차원에서 중형(重刑)을 가했다. 그러나 이들의 뿌리이자 최대 정적이었던 노론(老論)이라는 붕당에 대해서는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대우했다.

일찍이 왕세손 시절 ‘홍재’라는 자호에 담았던 뜻처럼 넓은 도량으로 정적인 노론의 신하들을 대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가 폭군 연산군의 전철을 밟지 않고 오히려 세종과 더불어 조선사를 빛낸 최고의 성군으로 자신의 치세(治世)를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한국사의 역대 임금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정조의 제왕론(帝王論)인 ‘군사(君師)’, 즉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는 독특한 철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유학(혹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임금에게 죽을 때까지 학문적 자질과 능력을 요구한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문치(文治)의 나라였다. ‘경연제도(經筵制度)’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비록 신분은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지존(至尊)이지만 조선의 임금은 끊임없이 학문을 닦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학생에 다름없었다.

이때 임금은 제자였고 유학과 성리학에 능숙했던 엘리트 집단 출신의 신하들은 스승이었다. 유학과 성리학의 경전을 텍스트 삼아 높은 학문과 식견을 지녔다고 인정받은 조정의 대신들이 임금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거나 강의하는 것이 경연의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켜 버렸다. 그는 ‘군사(君師)’라고 자처하며 오히려 신하들을 가르쳤다. 경연의 자리에서도 시험 대상은 정조가 아니라 신하들이었다. 정조는 권력이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혹은 지적 능력으로 신하들을 다스린 임금이었다.

세종 이외에 이러한 임금은 없었다. 그것은 정조가 조정 안의 신하들은 물론이고 조정 밖의 유학자(성리학자)들을 압도할 만큼 높은 수준의 학문적·지적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군사(君師)’라고 자처한 정조는 세상의 웃음거리이자 조롱거리로 남았을 것이다.

로마의 네로 황제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자신을 역사상 ‘최고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가 가진 권력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최고의 시인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네로가 우쭐대면 우쭐댈수록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조롱거리로 삼았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난 후 네로는 역사상 가장 어리석고 무지한 제왕으로 기록되었다.

무치(武治), 곧 칼과 군사로 사람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지만 문치(文治), 곧 붓과 글로 사람들을 감복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조는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정약용과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와 지식인들이 스스럼없이 ‘임금이자 스승’이라고 여길 만큼 높은 학문과 깊은 식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군사(君師)’라고 자처한 정조를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사람은 없다.

정조의 ‘넓은 도량’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왕세손 시절부터 학문과 독서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당대의 어떤 지식인이나 학자들 보다 높고 넓은 정신세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정적들을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가르쳐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는 논리는 정적들을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교화의 대상으로 보겠다는 것, 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다.

연산군은 ‘죄인의 아들’로 더러운 피가 흐른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내 폭군이 되었고, 광해군은 정비(正妃)의 출생이 아닌 후궁의 소생이라는 콤플렉스로 말미암아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지녔지만 암군(暗君)의 신세를 모면하지 못했던 반면 정조는 자신을 죄인의 아들로 만든 정적들을 초월해 넓고 깊은 학문 세계와 높고 당당한 정신세계를 구축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스승이 제자를 대하듯 혹은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듯 다스렸던 셈이다.

정조처럼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독서를 통해 넓은 학문과 깊은 식견을 갖추면서 독보적인 정신세계를 구축한 사람은 구태여 남과 자신의 우열을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콤플렉스가 없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조 나름의 독창적인 정치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론(君師論)’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고 자신까지 음해하고 암살하려고 한 정적조차 교화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한 높고 깊은 뜻이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자신이 호로 삼았던 ‘홍재’처럼 넓은 도량으로 자신에게 칼날을 겨눈 정적조차 가르침과 교화의 대상으로 볼 만큼 정조가 구축한 학문세계와 정신세계는 높고 거대했다.

정조가 도달한 높고 거대한 학문세계와 정신세계는 일찍이 어떤 임금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184권 10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개인 문집(文集)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긴 사실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송자대전(宋子大典)』의 우암 송시열이나 『성호사설(星湖僿說)』과 『성호전집(星湖全集)』의 성호 이익 그리고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다산 정약용에 견줄 만한 저술 분량이다.

더욱이 송시열과 이익은 83세까지 장수했고, 정약용 역시 75세까지 살았던 반면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단명(短命)했다. 송시열과 이익보다는 34년, 정약용보다도 26년이나 덜 살았다.

70세까지만 살았더라도 정조는 평생 500여권의 서적을 저술한 정약용을 넘어서는 서책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조는 ‘군사(君師)’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단 한 사람의 제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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