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弘齋) 정조 이산④ “오직 인재만 취해 온 세상 협력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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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弘齋) 정조 이산④ “오직 인재만 취해 온 세상 협력하도록 하겠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5.0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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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㉜
▲ 정조의 어진.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러나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정조는 정적들의 암살 시도와 역모 사건에 시달려야 했다. 정조의 넓은 도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는 목적 때문에 정적 노론 세력은 흉악무도한 짓을 멈추지 않았다.

정조에 대한 첫 번째 암살 시도는 즉위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1777년 7월28일과 8월11일 밤 침소에까지 찾아든 자객에 의해 일어났다.

당시 수포군에 붙잡힌 자객은 전흥문이라는 자였는데 심문 과정에서 그는 “홍삼범은 임금이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아버지 홍술해와 홍지해를 섬으로 유배 보내고 다시 홍인한과 정후겸을 사사(賜死)하자 임금을 시해하기로 결심한 다음 자객을 불러 모았다”고 실토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이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체포해 조사하면서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지금의 임금은 나라를 잘못 다스리고 있는 것이 많다. 새로운 임금을 추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인조반정 때와 같이 해야 한다.”

자신들이 속했던 노론의 전신인 서인(西人)들이 반정을 명분 삼아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거머쥔 사례를 본받아 계획을 꾸미고 행동하려 했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피력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즉위 2년을 넘긴 1778년 7월18일에는 서명완의 고변으로 역모 사건이 일어났고 1782년(정조 6년) 11월20일에는 참언(讖言)으로 민심을 뒤흔든 술사(術士)들이 개입한 전국적 규모의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1785년(정조 9년) 2월29일에도 고변에 의해 역모를 꾸민 일당을 토벌하는 일이 있었고, 1786년(정조 10년)과 1787년(정조 11년) 역시 연이이 크고 작은 역모 사건이 일어났다.

정조 스스로 임금에 오른 지 1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국이 안정됐다고 말한 것처럼 1788년(정조 12년)에 들어와서야 즉위 초부터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암살 음모와 역모 사건이 잠잠해졌다.

한 해 건너 한 해 꼴로 일어난 역모 사건을 처리할 때마다 정조는 넓은 도량과 피의 복수 사이에서 고민하고 번뇌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은 성군과 현군 그리고 폭군과 암군 사이를 수없이 오고 갔을 것이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 12년 동안이나 암살과 역모 사건에 시달렸다는 것은 영조 재위 50여년 동안 조정 안은 물론이고 사회 구석구석까지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노론 세력의 힘과 영향력이 그만큼 거대하다는 사실을 반증했다.

정적들의 끝없는 도발과 저항 앞에 정조는 과거 연산군과 광해군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었을 위기와 피의 복수를 하고 싶은 유혹의 순간을 숱하게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정조는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정책으로 정적들을 압도했다.

정국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정조는 드디어 자신이 오랜 세월 구상했던 개혁 정책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정조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격적이고 과감한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남인(南人)인 번암(樊巖)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한 것이다. 80년 만에 나온 남인 출신의 정승이었다.

『정조실록』에도 채제공을 ‘특별히’ 우의정에 임명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정조의 행동은 숙종 이후 80여년 가까이 조정에서 배척당한 남인을, 노론을 견제할 정치세력이자 개혁정치의 파트너로 삼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세력 판도의 변화와 더불어 정조는 『서경(書經)』에서 또 다른 뜻을 취해 자호를 지었다.

재위 14년이 되는 1790년 자신의 침실에 새로이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는 “붕당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만을 취해 온 세상이 협력하도록 하겠다”는 ‘탕평(蕩平)’의 정치철학이 담겨 있었다.

‘탕탕평평’은 유학의 3경(三經) 중 하나인 『서경』 ‘홍범(洪範)’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무편무당(無偏無黨)하면 왕도탕탕(王道蕩蕩)하며 무당무편(無黨無偏)하면 왕도평평(王道平平)하며 무반무측(無反無側)하면 왕도정직(王道正直)하리니 회기유극(會其有極)하여 귀기유극(歸其有極)하리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어느 한쪽 당파(黨派)에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王道)가 넓고 넓을 것이다. 어느 한쪽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어느 한쪽 의견에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王道)가 평탄하고 평탄할 것이다. 항상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기울지 않는다면 왕도(王道)가 바르고 곧을 것이니, 그것이 모여 극(極)이 있고 그것이 돌아와 극(極)이 있을 것이다.”

▲ 여기에는 제왕이면서 철학자였던 정조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 있는 『일득록(日得錄)』.

정조는 평소 자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글로 적어 기록해 두었는데, 이 글을 모아 엮은 것이 『일득록(日得錄)』이다. 여기에는 제왕이면서 철학자였던 정조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 있다.

필자는 『일득록』을 처음 읽고 난 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치열한 사색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최고의 명저이자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 로마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견줄만한 책이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정작 『명상록』은 유명한 반면 『일득록』은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니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이 『일득록』의 ‘정사(政事)’편에서 정조는 침실의 이름을 ‘탕탕평평실’이라고 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경연의 신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새롭게 침실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탕평(蕩平)이라는 두 글자는 곧 우리 성조(聖祖: 영조) 50년 동안의 성대한 덕업(德業)이다.

내가 밤낮으로 생각하는 한 가지는 오직 선열(先烈)을 추념(追念)하고 계승하는 것이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과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그리고 신 맛과 짠 맛 또 관대한 것과 엄격한 것을 막론하고 오직 인재만을 취해 세상으로 하여금 함께 협력하고 공경하여 모두 대도(大道)에 이르도록 해 영구히 화평(和平)의 복을 누리게 할 것이다.

특별히 당(堂)에 편액(扁額)을 거는 이유는 대개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내가 표준(標準)을 세운 뜻을 알게 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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