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弘齋) 정조 이산⑤…“조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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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弘齋) 정조 이산⑤…“조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5.07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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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㉜
▲ 정조의 능행도. 원안은 정조.

[한정주=역사평론가] 탕평정치(蕩平政治)는 정조가 아닌 영조 때 처음 나왔다. 이때 탕평책의 핵심은 ‘쌍거호대(雙擧互對)’였다. 이것은 한 당파의 인물을 등용하면 반드시 대등한 직위에 상대 당파의 인물을 등용하는 인사정책이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나쁘게 말하자면 붕당의 머리수를 맞춰 채우는 형식적인 정책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영조 때 이 정책은 노론의 세력을 더욱 키워줬을 뿐이다.

남인을 등용하면서 노론을 등용하고 소론을 등용하면서도 노론을 등용한다면 다른 당파와 비교해 노론은 2∼3배 이상의 세력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조정을 장악한 노론이 자기 당파의 사람들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요직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정조 16년인 1792년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기 이전 80여년 동안 남인 출신으로 정승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영조 시대 내내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이 얼마나 거대한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정조는 영조 시대의 탕평책을 획기적으로 개혁한 새로운 탕평책을 추진했다.

정조는 탕평책의 핵심 취지와 기본 철학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다. ‘붕당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 있는 인재를 취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정조 탕평책의 근본정신이었다.

영조 시대와 다른 정조 시대 탕평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붕당을 초월해 그동안 조정에서 배척당한 채 재야에 묻혀 있던 인재들을 과감하게 중용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남인 실학파의 거목인 성호 이익의 종손(從孫) 금대(金帶) 이가환이다.

공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던 이가환은 특히 정조 개혁정치의 파트너였던 남인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실질적 리더였다. 이가환은 이익의 가풍(家風)과 가학(家學)에 힘입어 서양의 학문 및 과학기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혜환거사 이용휴를 따라 고문체를 모방하거나 답습하기 보다는 ‘기궤첨신(奇詭尖新)’의 새로운 문풍(文風)을 개척하는 등 일세를 풍미하고도 남을 천재였다.

이 때문에 노론의 간관(諫官)들로부터 서학(西學)의 수괴이자 괴벽한 문체를 일삼아 정학(正學)인 성리학을 어지럽히는 난적(亂賊)이라는 비난과 공격을 수없이 받았다.

그런데 이때마다 정조는 이가환과 같은 사람이 기이한 학문과 괴이한 문장에 빠진 까닭은 그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을 당파가 다르다고 배척해 올바르게 재주와 능력을 쓸 기회조차 주지 않은 조정 혹은 집권 세력에게 잘못이 있다고 두둔했다.

이와 관련한 기록이 『정조실록』에 남아 있다. 당시 정조는 노론 당파의 홍문관 부교리 이동직이 이가환을 탄핵하자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신하들에게 일찍이 자신이 자호로 삼은 ‘탕탕평평실’의 정신과 철학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일깨워주었다.

“저 가환(家煥)은 일찍이 좋은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100년 동안 조정에서 밀려나 수레바퀴나 깎고 염주알이나 꿰면서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이나 초야에 묻혀 지내는 백성이라고 자처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렇다 보니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비분강개한 언사였고, 뜻을 함께 해 모이는 사람들은 해학을 일삼고 괴벽한 행동을 하며 숨어 지내는 무리였다. 주변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말은 더욱 치우치거나 비뚤어진 것이고, 말이 치우치고 비뚤어질수록 문장 역시 더욱 기궤(奇詭)해진 것이다.

그래서 다섯 색채로 수놓은 아름다운 문장은 당대에 빛을 본 자들에게 양보한 채 굴원의 『이소(離騷)』나 『구가(九歌)』에 가탁(假託)해 스스로 노래한 것인데, 그것이 어찌 가환이 좋아서 한 일이겠는가. 조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마침내 내가 ‘복을 모아 백성에게 나누어 준다’는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을 모범으로 삼고 성대한 공적과 신이한 조화의 단서를 남긴 선왕을 계승하여 특별히 연침(燕寢)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걸고 ‘온 세상 구석구석에까지 미친다’는 뜻의 ‘정구팔황(庭衢八荒)’ 네 글자를 크게 써서 여덟 개의 창문 위에다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돌아보고 살피면서 끝없는 가르침으로 삼고 있다.

이에 가시덤불 길에 놓여있고 누더기를 걸치며 사는 사람들을 초야에서 뽑아 조정으로 불러 올렸다. 가환은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그대는 가환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지 말라.

가환은 바야흐로 골짜기로부터 나와 교목(喬木: 곧고 굵으며 높이 자란 나무)이 된 것이고, 부패한 것이 변화하여 새롭게 된 것이다. 그의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가 어찌하여 점차 아름다운 경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근심하는가.

가환의 재주가 우둔(愚鈍)하여 사흘 동안에 괄목할 만한 변화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아들과 손자가 또한 어찌 번번이 반드시 양보만 하고 스스로 자신의 소리를 융성하게 드러내지 않겠는가.” 『정조실록』 16년(1792년) 11월6일

당파를 가리지 않고 초야와 시골에 묻혀 있는 능력 있는 인재를 발굴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재주와 역량을 올바르게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조정과 집권 세력의 의무라는 얘기다.

이렇듯 영조의 탕평책이 당파적 안배를 고려한 소극적인 정책이었다면 정조의 탕평책은 당파를 초월해 조정 안팎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발굴해 중용하는 적극적인 정책이었다.

정조 탕평책의 두 번째 특징은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붕당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만을 취하여 온 세상이 협력하도록 하겠다”는 ‘탕탕평평’의 철학은 붕당의 입장과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인재들을 육성하는 정책을 낳았다. 그것이 바로 ‘초계문신’이다.

초계(抄啓)란 본래 의정부(議政府)에서 학문적 재능을 갖춘 젊은 인재들을 선발해 임금에게 보고하는 제도다. 그런데 정조는 37세 이하의 당하관(堂下官) 가운데 참신하고 유능한 관료들을 선발해 초계문신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규장각(奎章閣)에서 학문 연마 및 연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매월 두 차례의 구술고사와 한 차례의 필답고사를 통해 성적을 평가하고 상벌을 내렸다.

이곳을 통해 장차 조선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갈 젊은 개혁 인재들을 양성하고자 했던 정조는 몸소 초계문신들에 대한 강론에 나서는 한편 직접 시험 감독이 되어 채점을 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규장각이라는 공간과 초계문신이라는 제도를 통해 정조는 한 사람의 스승이 되어 제자나 다름없는 젊은 개혁 인재들을 가르쳤다고 하겠다. 이 때문에 규장각은 국왕과 조정의 중신 그리고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젊은 관료들이 모여 학문을 연구·토론하고 나라의 정책과 발전 방향을 의논하는 실질적인 정치의 중심무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조 즉위 6년째인 1781년부터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20여년 동안 초계문신에 선발된 관료들이 13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조가 길러낸 개혁 관료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정조의 뜻대로 새로운 정치세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 초계문신 가운데 정약용은 정조가 가장 총애한 ‘최우등 개혁 인재’였다. 특히 정조는 붕당을 초월해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해 중용한다는 ‘탕탕평평’의 원칙에 따라 초계문신을 선발했기 때문에 남인 출신의 정약용은 물론 정조 시대 내내 최대의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의 서영보, 노론 시파의 김조순, 소론의 서유구 등 다양한 당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조 탕평책의 세 번째 특징이자 가장 혁신적인 정책은 ‘서얼허통(庶孼許通)’이다.

조선 시대에 차별과 배제는 붕당 사이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정작 더 중요하고 심각한 정치적·사회적 문제는 신분 특히 서얼에 대한 차별과 배제였다. 정조는 붕당뿐만 아니라 신분과 출신 배경을 초월해 인재들이 나라와 백성에게 보탬이 되도록 자신의 재주와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정조는 즉위 초인 1777년 3월 21일에 이조와 병조에 명을 내려 서얼 출신의 관직 진출을 위한 절목(節目)을 상세하게 마련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들 서류(庶類)도 나의 신하요 자식이다. 그런데 그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또한 그들이 자신의 포부도 펴보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 또한 과인의 허물이 된다.”

이 서얼허통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가 다름 아닌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등 서얼 출신의 규장각 ‘4검서관’이다. 1779년(정조 3년) 이덕무를 시작으로 차례로 검서관에 발탁된 이들 4검서관은 정조 시대 ‘문치와 문예부흥’에 큰 공을 세웠다.

연암 박지원은 당시의 일을 가리켜 뛰어난 학문과 높은 식견에도 불구하고 ‘여항(閭巷)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일생을 마칠 뻔한 이들’이 성군을 만나 크게 이름을 빛낼 수 있었다고 했다.

비록 탕평정치는 정조가 사망한 후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와 같은 집권 노론 가문의 ‘세도정치(世道政治)’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탕탕평평실’이라는 자호에 새긴 ‘붕당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만을 취해 온 세상을 협력하게 하겠다’는 그 뜻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치철학이자 리더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德目)이라고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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