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의 즐거움…“그저 자신이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위해 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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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無爲)의 즐거움…“그저 자신이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위해 일하라”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5.15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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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88)
 

[한정주=역사평론가] 아무 일이 없을 때 지극한 즐거움이 있다.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훗날 반드시 그대가 문득 깨우치게 된다면 이것을 위해 근심하고 걱정하는 때일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전 관청의 수령은 평온하고 조용한 성품을 갖춰서 이렇다 할 일을 하지 않아 백성들에게 베푼 혜택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후임으로 온 수령은 몹시 사납고 잔혹하다.

그때서야 백성들은 비로소 예전 수령을 한없이 생각하며 그리워한다.(재번역)

無事時至樂存焉 但人自不知耳 後必有忽爾而覺 爲此憂患時也 如前官恬靜 別無施惠於民 及其後官稍猛鷙民 始思前官不已也. 『이목구심서 2』

‘무위도식(無爲徒食)’과 ‘무위지치(無爲之治)’라는 말이 있다. 모두 무위를 말하지만 전자는 무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나쁜 행위라고 하는 반면 후자는 무위야말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의 진리라고 한다.

같은 말을 갖고 어찌 이리도 다르게 사용한단 말인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말까지 이렇게 저렇게 제멋대로 써먹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와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을 쥐고 있는 자신들의 무위(無爲)는 지극히 높고 바른 것이지만 자신들을 위해 피땀 흘려 일해야 할 자들의 무위(無爲)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될 천하의 몹쓸 짓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이러한 까닭에 ‘무위지치’는 최선(最善)의 용어가 된 반면 ‘무위도식’은 최악(最惡)의 용어가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무위지치’가 최선이라면 ‘무위도식’ 역시 최선이다. 만약 ‘무위도식’이 최악이라면 ‘무위지치’ 역시 최악이다.

누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서 지극한 즐거움을 누리고, 누구는 피땀 흘려 일하는 것에서 지극한 즐거움을 누려야 한단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서 지극한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이익과 명예와 권세와 출세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일한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한 까닭에 칼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마르크가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천부적으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나 좋아하지 않는 일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기계처럼 일하다 폐기되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권력의 도구가 되어 뼈 빠지게 일하다가 버려지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 거부의 전략이 무엇인가? 바로 무위도식이다.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을 사람들은 무위도식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일하지 않고도 돈을 벌어온다면 누구도 무위도식한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는데도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은 무위도식한다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며 조롱한다.

일을 하느냐 일을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돈을 벌어 오느냐 벌어 오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뭐 이따위 용어가 있단 말인가? 돈과 권력을 위해 일하지 말라. 그저 자신이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위해 일하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위(無爲)’의 지극한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려면 오히려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삶’을 긍정하고 창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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