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다른 독특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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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다른 독특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5.25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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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② 기묘(奇妙)와 기궤(奇詭)의 미학①
 

[한정주=역사평론가] 홍길주(1786~1841년)라는 사람은 사실 고전과 역사 공부를 전업 삼아 살아온 필자에게도 -비록 한때였지만- 매우 낯선 존재였다.

그러나 2006년 정민 교수가 홍길주의 일부 산문과 수필을 번역해 출간한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각 창고』(돌베개)라는 책을 접한 다음부터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에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에 버금갈 만한 필력을 갖춘 또 한명의 걸출한 문사(文士)가 조선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박지원의 글이 ‘호방(豪放)’하고 정약용의 글은 ‘단정(端正)’하다면 홍길주의 글은 ‘기이(奇異)’했다.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16세기 이후 정치-지식 권력을 좌지우지한 사림(士林) 세력은 대개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황은 경북 안동, 조식은 경남 합천, 이이는 경기 파주와 해주 그리고 송시열은 충북 괴산(옥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며 정치 활동을 했다. 이 때문에 사림을 일컬어 재지사림(在地士林: 영남사림, 근기사림, 호남사림 등)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들과는 다르게 누대(累代)에 걸쳐 한양과 그 인근 지역에 살면서 중앙 핵심 관직에 등용되어 권력과 부를 동시에 거머쥐었던 양반 사대부 가문들이 있었다. 안동 김씨, 반남 박씨, 풍산 홍씨, 달성 서씨 등이 그들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들 가문을 일컬어 ‘경화거족(京華巨族)’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재지사림과는 다른 독특한 가풍(家風)과 세련되고 수준 높은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사제(師弟) 관계를 통해 학문과 사상을 전수했던 재지사림과는 다르게 이들은 가학(家學)을 통해 학문을 다지고 사상을 형성했다.

18~19세기에 서명응·서호수·서유구 등을 배출한 달성 서씨 가문이 ‘실학(實學)과 농학(農學)’을 가학으로 전수했다면 홍석주·홍길주·홍현주 등을 배출한 풍산 홍씨 가문은 ‘문장학(文章學)’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특히 당대 최고의 학식과 문장을 갖추어야만 맡을 수 있는 문형(文衡)인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내고 좌의정에까지 오른 형 홍석주나 정조의 둘째 딸 숙선옹주와 혼인하여 부마인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진 동생 홍현주와는 다르게 홍길주는 20세를 전후한 젊은 시절부터 경전(經典)에 정통하고 이미 문장에 통달했다는 찬사를 한 몸에 받았지만 벼슬이나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오로지 문장에만 힘을 썼다.

홍길주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관심사는 오직 문장 이외에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어렸을 때 문장에만 정신이 팔려 가슴속에서 갑자기 기이한 문장을 한두 구절 완성하거나 이따금 사물과 마주하여 문장을 짓는 데 쓸 만한 기묘한 비유나 빼어난 말을 얻기라도 하면 종종 작은 쪽지에 기록해 상자 속에 간직하곤 했다. 나중에 글을 지을 때 녹이고 다듬어서 사용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길주,『수여방필(睡餘放筆)』

이렇듯 홍길주는 기이한 문장, 기묘한 비유, 빼어난 말을 얻어 글을 짓는 것에 온 생애를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그는 30세 이전에 쓴 글들을 모아 엮은 『현수갑고(峴首甲藁)』, 30세 이후부터 50세까지 지은 글들을 모아 엮은 『표롱을첨(縹礱乙㡨)』 그리고 50세 이후의 저작들을 모아 엮은 『항해병함(沆瀣丙函)』등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많은 분량의 글, 특히 산문과 수필들을 남겨 놓았다.

홍길주는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도 비평가들로부터 ‘기발한 발상’, ‘절묘한 구성’, ‘기이한 문장’ 등 기묘(奇妙)하고 기궤(奇詭)한 문장 미학을 가장 잘 구사하고 실현한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인 계곡 장유(1587~1638년)는 “예부터 지금까지 글을 지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진부한 글을 내놓지 않는 사람들만이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금릉 남공철(1760~1840년)은 “모방한 문장은 문장이라고 할 수 없다. 문장의 묘미는 진실한 마음을 표현하고 진실한 말로 묘사하는 것에 있다”거나 “세상에서 이른바 고문이라고 일컫는 문장은 모두 거짓에 불과하다. 거짓 고문을 쓰기 보다는 차라리 사실에 바탕을 둔 지금의 문장을 지어 이치를 반영한 것이 낫지 않겠는가. 다만 지금의 문장에서 그와 같은 문장을 얻지 못함을 한탄할 따름이다”고 역설했다.

진부하지 않고 모방하지 않으며 거짓으로 꾸며 글을 쓰지 않는 것, 그것은 옛사람이든 지금 사람이든 가릴 것 없이 글을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남과 다른 나 자신의 마음과 말을 표현해야 하며 만약 그러한 글을 쓴다면 그것은 저절로 옛 글이 아닌 지금 시대의 새로운 글이 된다. 따라서 문장의 지극한 묘미는 바로 나 자신에게서 나온 마음과 감성과 말과 언어로 지금 시대의 새로운 글을 쓰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에는 다른 사람과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기묘와 기궤의 미학’이 “글은 무엇보다 참신하고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창신의 미학’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후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조선 말기의 문장 비평가인 창강 김택영(1850~1927년)이 18세기를 풍미한 조선 지식인들의 문풍(文風)을 일컬어 기이하고 괴이하다는 뜻의 ‘기궤(奇詭)’와 동시에 날카롭고 새롭다는 뜻의 ‘첨신(尖新)’으로 표현한 까닭 역시 여기에 있었다.

다시 말해 ‘기궤(奇詭)한 것’이 바로 ‘첨신(尖新)한 것’이고, ‘첨신(尖新)한 것’이 바로 ‘기궤(奇詭)한 것’이다.

이 ‘기궤(奇詭)’와 ‘첨신(尖新: 혹은 창신(創新))’의 네 글자는 모든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항상 공존해야 할 미학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홍길주라는 문인은 비록 뒤늦었지만 독특한 발상과 새로운 문장으로 오늘날까지 이름을 전한 대표적인 문인 중의 한 사람으로 복원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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