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와 차 끓는 풍경…불가의 윤회설과 같은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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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와 차 끓는 풍경…불가의 윤회설과 같은 섭리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5.26 0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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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97)
 

[한정주=역사평론가] 세상사에서 벗어난 선생이 있었다. 만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은 깊은 산 속의 눈 덮인 초옥에서 등불을 밝히고 주묵(朱墨: 붉은 색의 먹)을 갈아 서책에 동그랗게 점을 찍는다.

오래된 화로에서는 향기로운 향연(香煙)이 하늘하늘 피어올라 허공으로 퍼져 화려한 공 모양을 만든다.

가만히 한두 시간 가량 감상하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어 웃곤 한다. 오른쪽에는 매화가 일제히 꽃 봉우리를 터뜨리고, 왼쪽에는 차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린다.

솔바람과 회화나무에 깃든 빗소리는 더욱 정취를 돋운다.(재번역)

有超世先生 萬峰中雪屋燈明 硏朱點易 古罏香烟 嫋嫋靑立 空中結綵毬狀 靜玩一二刻 悟竗忽發笑 右看梅花齊綻萼 左聞茶沸響 作松風檜雨 澎湃漰◯. 『선귤당농소』

늦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초봄 매화꽃 활짝 피고 차 끓는 소리 가득한 방안 풍경이 아늑하기 그지없다.

이덕무는 ‘매화에 미친 바보’라는 뜻의 ‘매탕(槑宕)’이라는 자호를 썼다. 한 마디로 ‘매화 마니아’였다.

매화는 1년 중 기껏해야 한 달 남짓 핀다. 1년 내내 언제 어느 곳에서나 매화의 풍모와 아취를 즐기고 싶었던 이덕무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했을까?

그는 밀랍으로 인조 매화를 만드는 방법을 창안했고, 마침내 인조 매화 제조에 성공한다.

“내가 17~18세 때 삼호의 수명정에서 고요하게 거처하면서 대개 3년 동안 매화를 주조하여 독서하던 등불에 비쳐 그림자를 취하였다. 세속과는 어울리지 않는 운치였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을 붙일 즐거움이 있었다.(‘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

이덕무는 이 인조 매화에다가 ‘윤회매(輪回梅)’라고 이름까지 붙였다. 벌이 꽃을 채취하여 꿀을 만들고 꿀이 밀랍이 되었다가 다시 밀랍이 꽃이 되는 섭리가 불가의 윤회설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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