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우연의 마주침과 어우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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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과 우연의 마주침과 어우러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6.0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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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② 기묘(奇妙)와 기궤(奇詭)의 미학②
 

[한정주=역사평론가] 홍길주의 문장 속에 깊게 스며 있는 기발한 발상과 절묘한 구성을 살펴보면 그가 옛사람을 모방하지도 않고 옛글을 답습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무엇’인가를 글에 담으려고 얼마나 노력했을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특히 그는 문장은 독서에만 있지 않고 또한 독서는 책 속에만 있지 않다고 하면서 산과 시내, 구름과 새나 짐승, 풀과 나무 등의 볼거리 및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모두 문장이자 독서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옛사람의 문장이나 경전을 텍스트 삼아 글쓰기를 배우고 익히던 사대부의 오래된 관행과 관습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논리이며 세상 만물과 생활 주변에서 마주치는 일상의 모든 것을 창작의 소재와 원천으로 삼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홍길주는 실제 40대 중반에 ‘통진(通津)’과 ‘수락산’을 다녀온 두 차례의 여행에서 우연하게 마주친 모든 사물과 자연 풍경과 구경거리와 여러 사건이 바로 자신에게는 독서였다고 하면서 -당시 보통의 지식인이나 문인들이 생각할 때는 도저히- 독서라고 할 수 없는 이 독서를 통해 ‘천하의 기이한 문장’을 수십 수백 편 읽을 수 있었다는 기발한 글 한 편을 일종의 수상록이자 수필집인 『수여방필(睡餘放筆)』의 시작 부분에 남겨놓았다.

여기에는 특정한 목적으로 떠난 여행길에서 우연하게 만난 온갖 구경거리와 뜻밖에 벌어진 촌극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목적과 우연’의 마주침과 어우러짐을 절묘하게 묘사한 독특한 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사람의 삶이나 글쓰기의 과정 자체가 ‘목적과 우연’의 마주침과 어우러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갖고 글을 쓰지만 그 글을 쓰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우연히) 여러 상황을 -반드시- 만나게 되고, 이 목적과 우연의 마주침과 어우러짐에 따라 글의 ‘목적과 의도’ 혹은 ‘발상과 구성’의 전략은 항상 변주(變奏)와 변화를 겪게 되고 대개 처음의 목적과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

그래서 애초 생각했던 글의 목적과 의도가 더욱 뚜렷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그 목적과 의도와는 전혀 다른 글을 얻기도 하고 또한 아주 새로운 글감과 글거리와 만나는 경우도 빈번하다.

예를 들자면 필자가 박지원과 정약용에 관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이덕무와 박제가와 유득공의 문장 혹은 성호 이익과 금대 이가환의 문장을 만나 18세기 문학사와 지성사를 더욱 뚜렷하게 알기도 하지만 뜻밖에 혜환 이용휴와 항해 홍길주라는 걸출한 문인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글의 매력에 흠뻑 빠져 애초 계획했던 여러 가지 것들을 제쳐두고 그들을 글감과 글거리 삼아 글을 쓰는 경우가 그렇다. 즉 목적은 항상 우연을 만나 반드시 변주와 변화를 겪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글쓰기뿐만 아니라 우리네 삶 전체가 이와 비슷한 맥락과 과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여기에서 소개하는 홍길주의 글 속에 등장하는 “어느 한 가지도 같은 것이 없다”와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혹은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같이 할 수 있겠는가?”와 “천하 문장의 기이한 변화를 마음껏 다한 것이다” 등의 말은 ‘목적과 우연’의 마주침과 어우러짐 혹은 ‘발상과 구성’의 전략과 변주에 대한 독창적인 글쓰기 철학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필자는 여기에서 인용하는 글이 비록 길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한 번 음미해 볼 것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내가 일찍이 이렇게 논한 적이 있다. ‘문장이란 단지 독서에만 있지 않고, 독서는 단지 서책에만 있지 않다. 산천(山川), 운물(雲物), 조수(鳥獸), 초목(草木)의 볼거리 및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하고 세세한 일 모두가 독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뜻을 간혹 내 저술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드러내 보였다. 더러 원고 속에 그러한 내용이 남아 있다.

저번에 여행과 유람을 다녀온 후 우연히 마주친 것들을 글로 써서 이러한 설(說)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자못 지루하고 보잘것없는 듯해 문집에는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 지금 그 초록을 약간이나마 옮겨 적어 여기에 보존해둔다. 그 글은 아래와 같다.

‘기축년(己丑年 : 1829) 4월 3일에 가형(家兄)을 모시고 아우와 함께 통진(通津)으로 성묘를 갔다. 그곳에서 하룻밤 자고 돌아왔다. 4월 7일에 다시 형님과 아우와 더불어 수락산(水落山)을 유람하다가 내원암(內院庵)에서 숙박한 뒤 이튿날 돌아왔다. 이 두 차례의 여행은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었다. 두 차례 모두 새벽에 출발하여 모두 다음날 황혼녘에 돌아왔다. 함께 여행했던 사람은 다 형님과 나와 아우였다. 세 사람 모두 가마를 타고 갔는데 두 차례 다 길을 가던 도중에 뜻하지 않게 비를 만났다. 대개 동일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통진 여행은 성묘를 위해서였고, 수락산 여행은 아름다운 풍경을 유람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성묘를 위한 통진 여행에서는 도중에 용금루(湧金樓)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났고,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기 위한 수락산 여행에서는 길을 가다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선조(宣祖)의 아버지)의 무덤을 만나 절하였다.

용금루의 승경(勝景)은 가면서 보고 오면서 보아 두 번 마주했고, 덕흥대원군의 무덤은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배알하였다. 용금루는 처음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우연히 만난 것이고, 덕흥대원군의 무덤은 처음부터 찾아가려고 생각했다가 배알한 것이다. 용금루는 두 번이나 조우(遭遇)했는데, 그 가운데 읍원루(挹元樓)가 자리하고 있어서 용금루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읍원루에 오를 때 사다리가 끊어져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덕흥대원군의 무덤은 한 번 배알했는데, 앞에는 판돈(判敦)의 묘가 있고 뒤에는 하원군(河原君)의 무덤이 있어서 날개를 이루고 있었다. 판돈의 묘에서는 비문만 읽었을 뿐 봉분은 보지 않았다. 하원군의 무덤에서는 비문도 읽고 봉분을 보았다. 그러나 절은 하지 않았다.

통진 여행에서는 형님, 나, 아우 세 사람 외에 하인 한 명이 노새를 타고 따라왔다. 수락산 여행에서는 형님, 나, 아우 세 사람 외에 조카 세 명이 나귀를 타고 따라왔고 하인은 걸어서 우리 일행을 쫓아왔다. 또한 손님 두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가마를 탔다. 한 사람이 앞서 가고 한 사람은 뒤따라갔다. 갈 때는 각기 따로 갔지만 올 때는 함께 왔다.

통진 여행에서는 이튿날 돌아올 때 비를 맞아 가마를 메는 무리들이 온통 비에 젖어버렸다. 수락산 여행에서는 첫날 입산(入山)하여 절에서 휴식을 취한 후 비를 만났기 때문에 별로 피로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리어 돌아오는 길에 큰 바람이 일어나고 먼지가 들이닥쳐 양쪽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통진 여행에서는 돌아오는 길에 밤섬을 건너서 마포의 하목정(霞鶩亭)에 오르자고 약조했으나 비를 만나는 통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음식을 차려놓고 우리 일행을 맞으려고 준비했던 사람들이 모두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

수락산 여행에서는 돌아올 때 갑작스럽게 길을 고쳐서 오산(梧山) 이씨의 별장을 찾는 바람에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분주히 다다랐다. 무릇 이와 같은 여러 일들은 또한 어느 한 가지도 동일한 것이 없었다.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을까?

또한 통진 여행에서는 두 번이나 물을 만났다. 모두 큰 강이었다. 양화(楊花) 나루에서는 아주 가깝고, 용금루에서는 멀리 보였다. 양천(陽川)과 김포(金浦)의 사이에서는 길 오른쪽을 옆에 끼고 멀리 계속해서 갔다. 양화 나루 뒤에는 다시 길이가 긴 한 작은 나루 있다. 양화 나루를 보좌하고 있는 형국이다.

수락산 여행에서도 역시 두 차례 물을 만났다. 모두 기이한 형세의 폭포였다. 옥류동(玉流洞)에서는 아주 가깝고, 금류동(金流洞)에서는 멀리 보였다. 덕흥대원군의 무덤과 내원암의 사이에서는 산길을 옆에 끼고 계속해서 내달렸다. 두 골짜기의 바깥에는 다시 유채(留債)의 은선대(隱仙臺)가 양 골짜기를 비추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다.

통진 여행에서는 김포의 여관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군수(郡守)가 우리 일행을 찾아와서 만났다. 이러한 일은 미리 기약하지 않았던 일이다. 수락산 여행에서는 이씨의 분암(墳庵 : 무덤 근처에 짓고 제사를 지내고 묘지를 관리하던 곳)에서 식사를 하다가 산승(山僧)이 우리 일행을 방문해 만났다. 이 일은 미리 기약했던 일이다. 이러한 일 역시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다.

통진 여행에서는 오고 가면서 모두 양천 읍(邑)의 길을 지나갔다. 그러나 양천 읍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수락산 여행에서는 갈 때는 흥국사(興國寺)를 지나갔으나 들어가 보지 않았고, 돌아올 때는 그곳에서 쉬며 점심을 먹었다. 이러한 일 또한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다. 모두 천하 문장의 기이한 변화가 지극한 것이었다.

그런데 통진 여행과 수락산 여행이 제각각 하나의 단락을 이루면서 서로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문장가의 혹은 끊어지고 혹은 이어지는 기이한 변화를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통진 여행에서는 돌아올 때 비를 만나서 비록 잠시라도 비에 흠뻑 젖는 괴로움을 겪었지만, 집에 돌아온 후에는 비가 더욱 심하게 내려서 사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날이 개었다. 이로 인해 폭포를 구경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으니 수락산 여행은 본디 통진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두 골짜기의 장쾌한 폭포 물줄기는 참으로 통진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빗줄기가 원천이 되어 수량이 불어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가닥의 맥락이 암암리에 계속 이어져 매우 기이한 정취를 이루었다. 구경하고 유람하는 장쾌함 역시 이미 비의 힘을 빌린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모두 원만하거나 아무런 결점도 없는 일은 없는 법이다. 또한 흠집이 없어 모두 만족할 만큼 완벽하게 지은 글도 존재하지 않는다. 절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만난 작은 비나 돌아오는 길에 만난 큰 바람 먼지는 일로 친다면 미세한 결점일 뿐이고, 글로 친다면 큰 물결이 지나간 뒤의 잔잔한 여운이라고 하겠다.

가마에 앉아 있으면 독서하기에 좋다. 그러나 통진 여행에서는 서책을 가져가지 않은 것이 한스러웠다. 그래서 수락산을 방문할 때는 당나라의 시인 위응물(韋應物)과 유종원(柳宗元) 두 사람의 시집 여러 권을 하인 한 명에게 맡겼다. 그 하인이 떠난 후 길 가던 도중에 여러 차례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분명 술에 취해 길에 엎어져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술을 못 마시는데 무슨 소리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길을 잃어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아우는 ‘그 하인은 매우 어리석어서 분명히 도봉산 길로 잘못 찾아 들어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우의 말이 가장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원암에 도착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데 비로소 그 하인이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늦었는지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과연 아우의 말과 같이 거의 백 여 리 가까운 길을 돌아왔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일은 이번 여행 도중에 겪은 한 가지 포복절도(抱腹絶倒)할 기이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문장가가 별도로 한 가지 경계를 열어 일대 파란(波瀾)을 일으킨 것에 비견할 만하다.

그러나 가마에 앉아 독서하는 흥취는 이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앞선 통진 여행에서 책을 가져가지 않았던 것과 일의 가닥과 맥락이 미세하게 이어지니 하늘의 조화와 자연이 이룬 재주의 묘미가 진실로 지극하다고 하겠다.

앞선 통진 여행에서는 용금루 위에 앉아『규장전운(奎章全韻)』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을 보았다. 뒤의 수락산 여행에서는 절에 있던 불교 서적과『화동정음(華東正音)』을 읽었고 또한 이씨의 별장에서 고사(攷事)와 신서(新書)와 관련된 여러 종류의 책을 볼 수 있었다. 책을 가지고 갔을 때나 책을 가지고 가지 않을 때나 서로 띠처럼 이어져 비쳐서 위응물과 유종원의 시를 적적하거나 쓸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와 같이 절세의 기이한 문장은 천하의 대 문장가인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이라고 해도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뒤에서 바라볼 것이다. 내가 이 두 번의 여행에서 천하의 기이한 문장을 읽은 것이 거의 몇 십 몇 백 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은 춤추고 발은 구르고 있었다. 반드시 책을 끼고 몇 줄의 까만 글자를 새가 울듯 목구멍과 치아 사이로 소리를 내어 읽은 다음에야 독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찌 이러한 이치를 말할 수 있겠는가?” 홍길주, 수여방필(睡餘放筆) 3칙(三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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