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獨樂)과 중락(重樂)…“홀로 누리는 즐거움보다 어울려 누리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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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獨樂)과 중락(重樂)…“홀로 누리는 즐거움보다 어울려 누리는 즐거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6.1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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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112)

[한정주=역사평론가] 정월 초하루에는 겨울의 큰 추위가 여전히 위세를 부려 사람이 제대로 기운을 펼 수가 없다. 매년 이것이 한스럽다.

사람이 반드시 나이를 한 살 더하고 점점 늙어 주름살이 늘어가니 또한 슬프다. 서로 만나 좋은 말을 나누지만 속된 기운만 가득해 맑은 사람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쌀을 동냥하는 화상(和尙)은 그 목소리가 사나워 가증스럽기만 하다.

어른들은 더러 새 옷으로 단장하고 자못 자랑스럽게 여겨서 먼지 하나라도 옷에 묻으면 입으로 불고 손으로 털며 호들갑을 떤다. 이러한 무리는 케케묵은 사람일 뿐이어서 눈여겨 볼 필요도 없다.

집집마다 양쪽 사립문에 재앙을 막는 부적으로 울지(尉遲)를 그려 붙였지만 조금도 귀신의 풍채를 갖추지 못했으니 한탄스럽다.

사대부가에서는 소를 잡아서 사람마다 붉은 소고기를 지니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마치 군대의 깃발과 같다. 이때 굶주린 솔개가 아래로 내려와서 고기를 가로채간다. 이것이 가장 좋지 않은 일이다.

무릇 정월 초하루는 외면에 국한시켜 본다면 비록 해가 새롭고 달이 새롭고 날이 새롭지만 풍습은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다. 단지 부모님이 건강하고 편안하며 형제가 화평하고 기뻐하며 색동옷을 입고 서로 어울려 춤추며 밝은 등잔과 따뜻한 술잔을 나누는 연회 앞에서 오래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만은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사람들은 정월 초하루가 유독 즐겁겠지만 타향(他鄕)에서 오랫동안 나그네처럼 지내는 사람과 새로운 것을 느끼고 옛 것을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정월 초하루보다 더 슬픈 날은 없다.

또한 나와 같은 사람은 슬픈 감정에 잠겨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영해(領海)에서 부모형제를 생각하자니 우울하고 슬프기만 하다.

곤륜산을 동남쪽으로 옮겨 놓겠다던 어린 시절의 즐거움은 어느 때에나 다시 돌아오겠는가.(재번역)

元日 大冬寒威尙在 人氣不能舒 每年可恨也 必加人一齡 漸老皺皮 可悲也 相逢吉談 多帶腐氣 淸者不欲聽也 齋米和尙 聲頑而太可憎矣 丈夫或餙以新衣 試影頗矜持 一塵粘着 口呵之 手彈之 惋惜不已 此輩陳人耳 若不盈眄也 家家雙扉 畫尉遅 沒無瞱然神彩 可歎也 士大夫家屠牛 人人持紅肉 往來如織 飢鳶跕跕下攫 此最不雅也 夫元日 在局外縱觀之 雖曰年新月新日新 風習苦無新趣味耳 但父母康寧 兄弟和悅 斑衣雙舞 明燈暖杯 獻壽筵前 此天下之至喜也 此輩人 可獨當元日爲樂耳 至如殊鄕久旅之客 感新悲昔之人悲 莫悲於元日 且如余者 哀情回薄難釋 而思親嶺海 只牢騷忉怛 崑崙山可移措於東南 兒時之樂 何時而返耶. 『이목구심서 1』

세상의 즐거움을 자기 혼자 누리는 것을 ‘독락(獨樂)’이라고 한다. 세상의 즐거움을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것을 ‘중락(衆樂)’이라고 한다.

명절, 특히 새로운 해의 시작을 기리는 원일(元日: 설날)은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때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다면 오히려 명절은 일 년 중 가장 외로운 때가 되고 만다.

여기에서 홀로 누리는 즐거움보다 사람들과 어울려 누리는 즐거움이 ‘참다운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깨우친다. 비록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중락(重樂)의 뜻만은 잃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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