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주가 추구했던 문체의 전복과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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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주가 추구했던 문체의 전복과 변주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6.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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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② 기묘(奇妙)와 기궤(奇詭)의 미학③
 

[한정주=역사평론가]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글쓰기 전략을 추구하는 홍길주의 미학은 ‘오로원기(吾老園記)’라는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오로원은 실제 존재하는 정원이 아닌 홍길주가 상상하고 꿈꾼 가상의 정원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홍길주는 보통의 기문(記文)에서 볼 수 있는 정원 주변의 풍경과 자연 경관 및 정원의 형태와 구조 그리고 정원에 담은 주인의 뜻과 생각은 묘사하지 않고 느닷없이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안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 있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 그 밖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른바 ‘앎’이란 안다는 것, 알지 못한다는 것, 다시 안다는 것, 또 다시 알지 못한다는 것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영원회귀’와도 같다.

문체의 형식은 기문(記文)이지만 실제 글의 내용 전개를 보면 논설(論說)이라고 할 수 있다. 기문의 형식을 빌려 논설을 펼치는 변칙적인 글쓰기, 즉 문체의 전복과 변주는 홍길주가 추구했던 ‘기발한 발상’과 ‘절묘한 구성’ 그리고 ‘기이한 문장’을 발현하는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항해(沆瀣)의 집에 들어와 이런저런 집들과 별채를 두루 구경한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태어나 처음 보는 볼거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하다고 말을 한다.

잠시 뒤에 오로원(吾老園)으로 데리고 들어가 연못 두 곳과 폭포와 절벽의 기이한 장관을 보이고, 삼광동천(三光洞天)을 엿보게 한 다음 태허부(太虛府)를 살피게 하니 또 망연자실하여 앞서 자랑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사람들 중에는 지난날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고 나서 성급하게 스스로 잘 안다고 여기는 자가 있다. 그 사람이 아는 것을 두고 아는 것이 아니라 할 수는 없지만 아는 것 외에 또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은 끝이 없다. 스스로 아는 것이 이미 지극하다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자다.

오로원을 보지 못한 자라 해서 정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오로원을 본 뒤에야 전에 알던 것이 다 안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연못 두 곳을 보지 못한 자라 해서 폭포와 절벽, 연못과 여울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연못 두 곳을 본 뒤에야 전에 알던 것이 다 안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삼광동천과 태허부를 보지 않은 자라 해서 계곡과 돈대와 정자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삼광동천과 태허부를 본 뒤에야 전에 알던 것이 다 안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오로원과 두 연못, 삼광동천과 태허부를 보고나서 ‘지금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다 구경하였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의 무지는 또한 과거와 다름이 없다. 과거에 스스로 안다고 여겼던 것이 이미 잘못되었으니, 그렇다면 지금 다 안다고 여긴 것이 다른 날 또 잘못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오로원의 바깥에는 북산이 있는데 북산 바깥에 어떤 경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고, 어떤 경관 바깥에 또 어떤 경관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줄기차게 이어져 끝이 없다.

아아! 도를 배우는 자가 갑자기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로원은 주인옹이 노년을 마칠 곳이다. 그 개략은 이미 원래의 글에 잘 드러나 있고, 글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은 또 붓으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식자(識者)에게 청하건대 이 오로원을 안다고 스스로 말하지 말지어다.” 홍길주, ‘오로원기(吾老園記)’ (홍길주 지음, 이홍식 옮김,『상상의 정원』, 태학사, 2008, p240〜242 인용)

더욱이 홍길주는 ‘독연암집(讀燕巖集)’이라는 글을 통해서는 연암 박지원(1737년(영조 13년)〜1805년(순조 5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방법을 통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읽으면 읽을수록 더더욱 기이해지고 닮아가는” 연암과 자신의 문장을 끊임없이 반추한다.

홍길주에게 있어서 박지원은 ‘또 다른 자신’이었다. 그것은 늙어서까지 ‘기이하고’, ‘기묘하고’, ‘독특한’ 문장을 추구하면서 끝없이 변화를 모색했던 홍길주의 또 다른 글쓰기 전략이었다.

홍길주는 박지원 사후 25년이 지난 182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박지원의 문집을 구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홍길주가 1786년생이니까 그의 나이 43세 때 박지원을 본격적으로 만난 셈이다.

일찍이 어렸을 때부터 과거를 포기하고 문장에만 매달렸던 홍길주가 뒤늦게 만난 박지원의 문장은 거대한 충격이자 신선한 자극이었다. 이때부터 홍길주는 박지원의 문장을 되풀이해 읽고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그 속에 담긴 새로운 시대정신과 기발하고 절묘한 문장 묘사와 독특한 글쓰기 철학을 배우고 익히면서 자신만의 문장을 단련하고 또 연마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풀어 호좌건을 짜서 이마에 올린 다음 거울에 비춰 기운 것을 바로잡는 것은 사람마다 똑같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 관례를 하고 호좌건을 쓸 때 손가락 두 개를 이마 위에 대고 가늠했기 때문에 거울을 비추어 볼 필요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혹 열흘이나 달포 남짓 거울을 보지 않다 보니 젊었을 때의 얼굴을 지금은 이미 잊어버렸다.

벗할 만한 사람이 있었는데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 몇 년 동안이나 얼굴을 모른 채 떠나보냈다면 한이 되기 마련이다. 나와 나의 가까움을 어찌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에 비하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지금 젊었을 때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을 한으로 여기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천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덕은 배울 만하고 그의 문장은 본받을 만하다면 나는 시대가 같지 않음을 한스러워할 것이다. 백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뜻과 기상과 말과 의론이 볼 만하다면 나는 시대가 같지 않음을 한스러워할 것이다. 수십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기상이 천지를 가로지를 만하고 재주는 천고를 뛰어넘을 만하며 문장은 수많은 것을 전도시킬 만하였다.

그는 세상에 살아 있었고 나도 이미 세상일에 통달하였지만 미처 보지 못했고 아직 함께 말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한으로 여기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나는 이미 수십 년 전의 나도 알지 못하게 되었는데, 하물며 수십 년 전의 다른 사람이겠는가?

이제 나는 거울을 가져다가 지금의 나를 비춰보고 책을 열어 그 분의 글을 읽어 본다. 그러니 그 분의 문장이 바로 지금의 내가 된다. 내일 또 거울을 가져다가 비춰보고 책을 펼쳐 읽어 보면 그 분의 문장이 곧 내일의 내가 될 것이다. 내년에 또 거울을 가져다가 비춰보고, 그 분의 책을 펼쳐 읽어 보면 그 분의 문장이 바로 내년의 내가 될 것이다.

나의 얼굴은 늙어가면서 더욱더 변할 것이고 변하면서 옛 모습을 잃어버릴 테지만 그 분의 문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더더욱 기이해지고, 내 얼굴을 따라 닮아갈 것이다.” 홍길주, ‘『연암집(燕巖集)』을 읽다’ (홍길주 지음, 이홍식 옮김,『상상의 정원』, 태학사, 2008, p108〜111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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