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것 하나 없는” 혜환 이용휴와 금대 이가환의 문장
상태바
“평범한 것 하나 없는” 혜환 이용휴와 금대 이가환의 문장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6.23 07: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② 기묘(奇妙)와 기궤(奇詭)의 미학④
▲ 혜환 이용휴(왼쪽)와 그의 아들 금대 이가환의 간찰. <성호기념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런데 홍길주보다 한 세기를 앞서 이미 ‘기궤(奇詭)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대 문장가가 두 사람이나 조선에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혜환 이용휴와 그의 아들 금대 이가환이다.

1786년생인 홍길주가 창작 활동을 한 주요 시기가 19세기 초·중반이었다면 1708년생인 이용휴와 1742년생인 이가환 부자는 18세기 전반에 걸쳐 글을 짓고 문명(文名)을 떨쳤다.

일찍이 왕성순의 명문선집(名文選集)인 『여한십가문초』의 바탕이 된 『여한구가문초』를 엮어 낼 만큼 고려와 조선의 시문을 꿰뚫고 있었던 탁월한 시문 비평가 김택영은 이용휴와 이가환의 독특한 문풍(文風)과 남다른 문기(文氣)를 가리켜 ‘기궤(奇詭)’와 ‘첨신(尖新)’의 네 글자로 요약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시(詩)는 고려의 익재(益齋) 이제현을 종주(宗主)로 삼는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연간에 시인들이 이를 계승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옥봉(玉峯) 백광훈, 오산(五山) 차천로, 허난설헌, 석주(石洲) 권필, 청음(淸陰) 김상헌, 동명(東溟) 정두경 등 여러 시인들은 모두 ‘풍웅고화(豊雄高華)’의 취향을 띠었다. 영조(英祖) 이래로 시풍(詩風)이 크게 한번 변모해 혜환(惠寰) 이용휴와 금대(錦帶) 이가환 부자(父子) 그리고 형암 이덕무, 영재 유득공, 초정 박제가, 강산 이서구 등의 시인들은 혹은 ‘기궤(奇詭)’를 주된 것으로 하고 혹은 ‘첨신(尖新)’을 주된 것으로 삼았다.” 김택영, 『소호당집(韶濩堂集)』, ‘신자하시집 서문(申紫霞詩集序文)’

또한 유만주는 『흠영(欽英)』에서 이용휴의 문장을 가리켜 ‘괴상하고’, ‘기이하고’, ‘독특한 것들뿐이며’ ‘평범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비평했다.

『흠영』은 유만주가 1775년(영조 51년)부터 1787년(정조 11년)까지 13년간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책이다. 유만주의 기록은 이용휴가 1782년 사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에 관한 가장 정확한 당대 비평이라고 할 만하다.

“이 사람의 문장은 지극히 괴상하다. 산문에서는 지(之)나 이(而) 같은 어조사를 전혀 쓰지 않으면서 시에서는 이런 글자를 회피하지 않으니 일반 사람들과 매우 다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진실로 병폐이지만 한편으로는 기이한 점이기도 하다. 혜환이 소장한 서책은 매우 방대한데 모두 기이하고 독특한 것들뿐이고 평범한 것은 한 종도 없다. 그의 기이함은 실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유만주, 『흠영(欽英)』(이용휴 지음, 박동욱‧송혁기 옮기고 씀,『나를 찾아가는 길 - 혜환 이용휴 산문선』, 돌베개, 2014, p11〜12에서 인용)

그에 대한 비난과 찬사 여부를 떠나 당대의 문장가나 호사가(好事家)들을 단번에 휘어잡았던 이용휴의 기궤하면서도 탁월했던 문장력은 정약용이 남긴 이가환의 비밀 행장(行狀)인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가환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남인의 영수라는 이유 때문에 노론에게 집중 공격을 당해 천주교도의 수괴로 몰려 역적의 죄를 뒤집어 쓴 채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까닭에 이가환에 관한 어떤 기록도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 없었다.

정약용은 젊은 시절 매형인 이승훈의 소개로 이가환을 만나 성호 이익의 학문과 문장을 배울 수 있었다. 그 때문에 18년 강진 유배생활을 끝내고 고향 마을로 돌아온 후 정약용은 뒤늦게나마 남몰래 묘지명을 지어 이가환을 추도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가환을 ‘잊혔진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기억해야 할 존재’로 만들고픈 정약용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

어쨌든 정약용은 이 묘지명에서 이가환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아버지 이용휴의 문장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용휴는 진사(進士)가 된 이후 다시는 과장(科場)에 들어가지 않은 채 문장 공부에 오로지 마음을 기울였다. 그는 동방(東方)의 상투(常套)를 근본부터 씻어버린 글을 힘써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지은 글은 기굴(奇崛)하고 참신하고 교묘하였으니, 요컨대 전우산(錢虞山: 전겸익)이나 원석공(袁石公: 원굉도)의 아래에 있지 않았다.

자호(自號)를 혜환거사(惠寰居士)라 하였다. 원릉(元陵: 영조) 말엽에 혜환의 명성이 한 시대의 으뜸이어서 무릇 글을 새롭게 바꾸고자 수련하는 자들이 모두 와서 수정을 받았다. 몸은 포의(布衣)의 반열에 있으면서 손으로는 문원(文苑)의 권력을 30여년 동안 쥐었으니 자고 이래로 없던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배의 문자가 지닌 하자(瑕疵)를 너무 심하게 척결(剔抉)하였기 때문에 그를 원망하는 시속(時俗)의 무리가 많았다.” 정약용,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

여기에서 또한 정약용은 “우리 성호 선생은 하늘이 보내신 특출한 호걸이다. 도덕과 학문이 고금(古今)을 초월했고 집안의 자제와 제자들 모두 대학자가 되었다. 일찍이 한 사람의 문하에서 학문의 융성함이 이러한 사례는 없었다”라고 밝히면서 성호 이익의 친조카인 이용휴가 실학의 최대 산실인 성호학파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문장가’였다고 기록했다.

물론 그 문장의 기궤함과 날카로움과 새로움 때문에 이용휴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혹평을 마치 숙명처럼 달고 다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용휴를 비난하고 혹평한 이들조차 그가 당대의 지식인과 문인들에게 끼친 영향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심노숭(1762년(영조 38년)〜1837년(헌종 3년))이 남긴 다음과 같은 글이 그렇다.

“서류(庶類)인 이덕무와 박제가는 당대에 명성이 있었다. 선군(先君: 심악수)께서는 그들이 지은 작품을 보시고 탄식하며 말하시길 ‘영조 말년에 이런 일종의 사음(邪淫)한 이용휴, 이봉환 같은 무리가 있었다. 이 무리들(이덕무, 박제가)이 그들을 본받아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으니 그 풍기(風氣)를 볼 수 있다. 이 무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대부의 자제들도 본받고 있으니 세도(世道)에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심노숭, 『적선세가(積善世家)』, ‘선부군언행기(先府君言行記)’ (이용휴 지음, 박동욱‧송혁기 옮기고 씀,『나를 찾아가는 길 - 혜환 이용휴 산문선』, 돌베개, 2014, p7에서 인용)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