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속물…“꾸미고 더하려고 하면 더 추잡해지고 난잡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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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속물…“꾸미고 더하려고 하면 더 추잡해지고 난잡해질 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7.01 0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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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125)

[한정주 역사평론가] 방 안에 금박 가루로 궁실과 인물을 그려놓은 왜연갑(倭硯匣)을 배열해놓는다.

한석봉의 액자 체첩(體帖)을 목각해 푸른 비단으로 장정을 하고 마디가 굵은 대나무로 필통을 만들어 회회청(回回靑)으로 ‘수부귀(壽富貴)’의 세 글자를 적고 구워서 늘어놓는다.

화분 속에는 금봉화(金鳳花: 봉선화)와 계관화(鷄冠花: 맨드라미꽃)를 잡다하게 심어놓는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비록 그 사람이 고상한 선비라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속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室中排列泥金畵宮室人物之倭硯匣 韓石峯額體帖 木刻靑裝砂筆筒 作竹節狀 回回靑 書燔壽富貴三字盆中 雜種金鳳花,雞冠花 人雖曰雅士 吾必謂之俗輩耳. 『이목구심서 2』

꾸미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추잡해지고, 더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난잡해질 뿐이라는 얘기다.

글도 마찬가지다. 나는 글쓰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가 ‘플러스(+)의 글쓰기’라면, 다른 하나는 ‘마이너스(-)의 글쓰기’이다.

‘플러스의 글쓰기’는 지식에 자꾸 지식을 더하고, 감정에 자꾸 감정을 더하고, 생각에 자꾸 생각을 더해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을 잘 쓰려고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플러스의 글쓰기’를 좇아가게 된다.

‘마이너스의 글쓰기’는 지식에서 다시 지식을 덜어내고, 감정에서 다시 감정을 덜어내고, 생각에서 다시 생각을 덜어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냥 마음이 가는대로, 감정이 일어나는 대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이너스의 글쓰기’를 좇아가게 된다.

조각가의 작업과 비교해 생각해보자. 조각가는 한 덩어리의 돌을 깎고 또 깎아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마이너스의 작업 방식이다.

물론 진흙을 붙이고 또 붙여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깎아내는 마이너스의 작업을 해야 작품이 완성된다.

다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匠人)의 지극한 경지는 순백의 ‘달 항아리’에 있다고 한다. 왜 그런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재주와 기술과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이라고 다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도자기를 만들 때 남이 쉽게 할 수 없는 기술이나 자신만의 기교를 자꾸 덧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달 항아리는 그러한 기술과 기교를 생략한 채 아무것도 장식하지 않은 순백의 도자기다. 표현하지 않으면서 표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마이너스의 예술철학을 온전히 담고 있는 작품이 아닌가?

글쓰기 역시 이러한 이치와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다만 ‘마이너스의 글쓰기’를 하려고 해도 불쑥 불쑥 ‘플러스의 글쓰기’가 되고 마는 내 처지가 안타깝고 애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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