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삭과 굴원…세상·시대·사상의 반도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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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삭과 굴원…세상·시대·사상의 반도가 되는 것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7.07 0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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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128)

[한정주 역사평론가] 동방삭(東方朔)은 세상을 조롱한 사람이다. 영균(靈均: 굴원)은 세상에 분개한 사람이다.

그들의 고심(苦心)은 모두 눈물겹다고 하겠다.(재번역)

方朔玩世 靈均憤世 其苦心皆可涕. 『선귤당농소』

세상을 조롱하거나 세상에 분개하는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만약 진정 세상을 바꾸려고 고심(苦心)한다면, 그 사람은 마땅히 ‘세상의 반도(叛徒)’가 되어야 한다.

유학·성리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유학과 성리학의 반도(叛徒)’가 되어야 한다. 허균이 그러했고, 이탁오가 그러했고, 루쉰이 또한 그러했다.

기독교·신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기독교와 신학의 반도(叛徒)’가 되어야 한다. 스피노자가 그러했고, 장 자크 루소가 그러했고, 포이에르바하가 또한 그러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자본주의의 반도(叛徒)’가 되어야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러했고, 안토니오 그람시가 그러했고, 체 게바라가 또한 그러했다.

사회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사회주의의 반도(叛徒)’가 되어야 한다. 루이 알튀세르가 그러했고, 질 들뢰즈가 그러했고, 안토니오 네그리가 또한 그러했다.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전체주의의 반도(叛徒)’가 되어야 한다. 조지 오웰이 그러했고, 김수영이 그러했고, 한나 아렌트가 또한 그러했다.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민주주의의 반도(叛徒)’가 되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러했고, 미셸 푸코가 그러했고, 노엄 촘스키가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민족주의를 마치 절대선(絶對善)처럼 숭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의 반도(叛徒)’임을 자처한 역사학자 임지현을 지지한다.

내가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었던 스무 살 이후 나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유일한 사람은 마르크스였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지금 ‘마르크스의 반도(叛徒)’이다.

무슨 말인가? 나는 마르크스가 남긴 철학과 사상의 참된 메시지는 바로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였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으로 ‘마르크스의 반도(叛徒)’가 되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이 있단 말인가?

세상의 반도가 되어 다른 세상을 만나고, 다시 그 세상의 반도가 되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 시대의 반도가 되어 다른 시대를 만나고, 다시 그 시대의 반도가 되어 또 다른 시대를 만나는 것. 사상의 반도가 되어 다른 사상을 만나고, 다시 그 사상의 반도가 되어 또 다른 사상을 만나는 것.

만약 누군가 인간으로 태어나 평생 짊어져야 할 운명이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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