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을 배우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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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배우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7.0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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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② 기묘(奇妙)와 기궤(奇詭)의 미학⑥
 

[한정주=역사평론가] “나와 남을 비교하면 나는 친하고 남은 소원하다. 나와 사물을 비교하면 나는 귀하고 사물은 천하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도리어 친한 존재가 소원한 존재의 말을 따르고 귀한 존재가 천한 존재에게 부림을 당한다. 무엇 때문인가? 욕망이 밝은 정신을 덮고, 습관이 진실을 감추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호오희노(好惡喜怒)의 감정과 행지부앙(行止俯仰)의 행동을 모두 제 주장대로 주도하지 못하고 남이 하자는 대로 따라하는 일이 발생한다. 심한 경우에는 말하고 웃는 것이나 표정과 자세까지도 저들의 장난거리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정신과 사고, 땀구멍과 뼈마디 하나도 나에게 속한 것이 없어졌다. 부끄러운 일이다.

내 벗 이처사(李處士)는 옛스러운 모습과 옛스러운 마음을 가졌다. 제 주견을 내세우지도 않고 겉치레를 꾸미지도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는 지키는 것이 있다. 한평생 남에게 청탁을 해본 일도 없고 좋아하는 물건도 없다. 오로지 부자가 서로를 지기(知己)로 삼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부지런히 일하여 스스로 농사지어서 먹고 살아간다.

수백에서 일천 그루에 이르는, 처사가 손수 심은 나무는 뿌리와 줄기, 가지와 잎이 한 치 한 자 모두 아침저녁으로 물주고 북돋아서 기른 것이다. 나무가 다 자라서 봄이면 그 꽃을 감상하고 여름이면 그 그늘에서 쉬고 가을이면 그 열매를 먹는다. 여기에서 처사의 즐거움이 어떠한지를 알 만하다.

처사는 또 동산에서 목재를 가져다가 자그마한 초가 한 채를 짓고서는 ‘아암(我菴)’이란 편액을 달았다. 사람이 날마다 하는 행위가 모두 자신으로 말미암는다는 생각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저 일체의 영화(榮華)와 세리(勢利), 부귀와 공명은 천륜(天倫)을 지켜 단란하게 즐기고, 본업(本業)에 갖은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과 비교하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껍데기에 불과한 것만이 아니다. 처사는 무엇을 선택하여야 하는지를 알았구나!

뒷날 내가 처사를 방문하면 아암(我菴) 앞의 늙은 나무 아래 함께 앉아서 ‘만인과 나는 평등하다(人我平等)’과 ‘만물은 하나의 몸이다(萬物一體)’라는 뜻을 다시금 토론해보아야 하겠다.” 이용휴, ‘아암기(我菴記)’ (이용휴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상)』‘혜환잡저 6’, 소명출판, 2007. 인용)

또한 ‘정덕승을 위해 장난삼아 집을 사는 문서를 짓는다(爲鄭德承戱作買宅券)’는 글에서는 조물주에게 집을 산다는 기발한 발상을 앞세워 놀이(장난) 삼아 가짜로 매매 문서를 작성해 집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조물주에게 임시로 빌려 쓰는 ‘점유의 존재’이지 결코 ‘소유의 존재’가 될 수 없다는 ‘토지공유사상’을 은미(隱微)하게 표현하고 있다.

“집을 지은 다음에는 계약서를 만든다. 집을 지은 지 몇 년 뒤에 해가 신(辛)의 자리에 있고, 달이 병(丙)의 자리에 있어 문서를 만들어 집과 교환하기에 알맞은 날이었다. 문서를 작성하니 그 내용은 이렇다.

‘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아무개가 조물주로부터 집 한 채를 샀다. 집은 모두 몇 칸이고 집 둘레는 여러 종류의 나무 몇 그루가 두르고 있다.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왼편은 진좌(震坐), 오른편은 태좌(兌坐)로 남향이다. 집 값은 동전 몇 백 냥이다. 이 문서를 작성한 이후로 세상이 다할 때까지 영원토록 집을 달라고 하는 자가 없으리라. 혜환도인(惠寰道人)이 남해대사(南海大士)의 옛 일에 따라 보증을 선다.’” 이용휴, ‘정덕승을 위해 장난삼아 집을 사는 문서를 짓는다(爲鄭德承戱作買宅券)’ (이용휴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상)』‘혜환잡저 9’, 소명출판, 2007. 인용)

이용휴는 고문(古文)을 다양하게 배우고 연구하되 문학적 실험과 모험을 멈추지 말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문장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식견을 갖추게 되면 이전의 문장을 과감하게 내던져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학적 실험과 창조의 과정을 ‘등산’에 비유하면서 “문장을 배우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아서 끝을 헤아리기 힘든 험한 길과 지름길을 다 밟아 본 뒤에야 산 정상에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자신이 말한 문장 작법조차 “오랫동안 보배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과감하게 내던져 버릴 것을 주문했다.

“네 숙부가 나이 17~18세 되었을 때는 문장을 지으면 대우(對偶)를 좋아했다. 그런데 조금 자라서 옛날에 지은 것을 보니 얼굴이 붉어져서 다 보지도 못하고 던져 버렸다.

송원(宋元)의 여러 작가들을 사숙하자 사람들이 꽤나 그런 내 문장을 칭찬했고 또한 나 스스로도 자부했다. 다시 그때 지은 것들을 보니 곧 가볍고 물러 터진 좀생이로서 작가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또 내던졌다.

그러다 선진양한(先秦兩漢)에서 구하여 아래로 명말(明末)에 이르기까지 고문(古文)으로 이름난 것을 아침저녁으로 자세히 연구했더니 그 단락 안배, 논의의 수렴과 확장, 글자 선택, 구절 연마 등의 방법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 햇수가 이미 30년이 되었다.

이제 그 글들을 꺼내서 읽어 보니 이따금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문장을 배우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아서 무한한 험한 길과 지름길을 다 밟아 본 뒤에야 산 정상에 나갈 수 있다’라고 했다. 나도 이것으로 헤아려 갔으니 너도 이 글들을 오랫동안 보배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이용휴, ‘길보의 문고에 부친다(題吉甫文稿)’ (이용휴 지음, 박동욱‧송혁기 옮기고 씀,『나를 찾아가는 길- 혜환 이용휴 산문선』, 돌베개, 2014. p176 인용)

심지어 이용휴는 당시 문장가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이자 전가의 보도처럼 여겼던 ‘문장의 전범(典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발언조차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옛것에 합치(合致)되려고 했다면 이제는 옛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쳤다.

이 말은 옛것의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은 독자적이고 특별한 글을 짓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문장가들이 최상의 비결로 삼아야 할 작가 정신이라는 얘기에 다름없었다.

“광국(光國)은 성품이 원만하고 너그럽지만 유독 시(詩)에 있어서만은 주장이 몹시도 엄격했으니 대개 문장이란 상제(上帝)가 가장 보배로 여겨서 아끼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인사 행정을 맡은 사람이 한때의 관품(官品)을 간혹 잘못하여 서용했다 해도 오히려 허물이 되는데, 하물며 상제의 평가를 뒤집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매번 다른 사람의 시를 볼 때마다 남들 따라 칭찬하고 헐뜯는 적이 없었으며, 그가 스스로 시를 짓는 것도 곧 자구(字句)를 깎고 다듬어서 반드시 옛사람의 법도에 합치된 뒤에야 내놓았다. 그런 까닭에 체재가 바르고 음운이 조화되어 세상의 울음과 웃음소리가 금(琴)이나 축(筑)과 뒤섞여 나와서 잡스럽게 연주되는 것과는 같지 않았으니 작가가 될 만하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다만 옛날에는 옛것에 합치되는 것을 취해 묘(妙)하다고 했으나 이제는 옛것을 벗어나는 것을 취해 신통하게 여기니 이것이 적임자를 기다리는 최상의 비결이다. 내가 이것을 광국에게 말해준다.” 이용휴, ‘족손(族孫) 광국의 시권에 부치다(題族孫光國詩卷)’

이렇듯 다양한 문학적 실험과 과감한 창조 그리고 문장의 전범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겠다는 독창적인 작가 정신을 바탕으로 삼아 이용휴는 누구도 오르지 못한 문장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겠다.

북학파 그룹의 일원인 이덕무와 박제가의 ‘기궤첨신(奇詭尖新)’한 문풍 역시 그들의 스승이자 벗이었던 박지원 보다 오히려 이용휴에게 더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였으니 18세기 중·후반 ‘문장학’에 있어서 이용휴의 위치가 얼마나 독보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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