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것 없지만 특별한 뜻 담는 발상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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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것 없지만 특별한 뜻 담는 발상의 전환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7.14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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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② 기묘(奇妙)와 기궤(奇詭)의 미학⑦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용휴의 아들인 이가환 또한 아버지의 문기(文氣)와 문풍(文風)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노론 계열의 조정 관료들이 정적(政敵)인 남인 출신 이가환의 문장을 두고 격렬하게 비난한 상소를 본 다음 정조(正祖)가 내린 비답(批答) 속의 변호 아닌 변호(?)를 보더라도 이가환이 얼마나 당시 사람들과는 다른 기궤하고 독특한 글을 즐겨 썼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저 가환(家煥)은 일찍이 좋은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100년 동안 조정에서 밀려나 수레바퀴나 깎고 염주알이나 꿰면서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이나 초야에 묻혀 지내는 백성이라고 자처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렇다 보니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비분강개한 언사였고, 뜻을 함께 해 모이는 사람들은 해학을 일삼고 괴벽한 행동을 하며 숨어 지내는 무리였다. 주변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말은 더욱 치우치거나 비뚤어진 것이고 말이 치우치고 비뚤어질수록 문장 역시 더욱 기궤(奇詭)해진 것이다.

그래서 다섯 색채로 수놓은 아름다운 문장은 당대에 빛을 본 자들에게 양보한 채 굴원의 『이소(離騷)』나 『구가(九歌)』에 가탁(假託)해 스스로 노래한 것인데, 그것이 어찌 가환이 좋아서 한 일이겠는가. 조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정조실록』16년(1792년) 11월6일

먼저 자신을 가리켜 ‘짐승’이라 하고 자신이 사는 집을 일컬어 ‘짐승이 사는 집’이라고 말하면서 똥을 먹는 개나 음란한 돼지만도 못한 자신은 ‘짐승만도 못한 자’이기 때문에 ‘짐승에 가깝다’는 말도 아깝다고 한 ‘금수거기(禽獸居記: 짐승이 사는 집에 관한 기록)’라는 이가환의 글은 기묘하다 못해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김화(金化)에 살게 되면서 몇 칸짜리 집을 세내었다. 그 집에서 독서하며 지내던 중 맹자가 진상(陳相)에게 말한 대목을 읽고서는 탄식의 말이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옛사람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며 편안하게 지내면서 교육을 받지 않는다면 짐승에 가깝게 될 것이다’라고 맹자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런 자라 해도 오히려 짐승보다 나은 점이 있을 것이다.반면에 나는 조정에서 쫓겨나 떠돌면서 옷가지와 먹을거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으므로 배부르고 등 따뜻하며 편안하게 지내는 자들과는 처지가 다르다.

옛 성인의 책을 읽기도 했고 오늘날의 군자들로부터는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이 많다. 그럼에도 짐승보다 못하니 ‘짐승에 가깝다’는 말을 어떻게 감히 쓸 수 있겠는가?

개는 똥을 먹는다. 개가 먹는 것을 사람은 똥으로 보지만 개는 먹을거리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똥을 먹는 것이 개의 의로움에 어떤 손상을 입히는가? 그러나 나는 가금 의롭지 않은데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진수성찬을 먹기도 했으므로 똥을 먹는 개보다 훨씬 못하다.

저 돼지는 음란하지만 제가 그릇된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원래 모른다. 그런데 지금 나는 부끄러운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아리따운 여인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는 짓거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모르고 저지르는 돼지보다 훨씬 못하다.

아! 먹는 것과 성욕은 많은 문제 가운데 일부를 들어본 데 지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로 넓혀 볼 때, 무엇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옛날에는 교육을 받지 못한 연유로 짐승에 가까워지는 사람조차도 성인께서는 염려하셨다. 그러니 교육을 받았음에도 짐승보다 못한 자를 두고서는 어떻다고 하시겠는가! 아아! 참으로 부끄럽구나! 참으로 부끄럽구나!” 이가환, 『시문초(詩文艸)』, ‘금수거기(禽獸居記)’

‘시(是)’라는 한자(漢字)를 아홉 번이나 반복 사용하면서 ‘시(是)를 즐거워하는 집’이라는 기궤한 뜻을 담은 ‘낙시려(樂是廬)’에 붙인 기문(記文)은 특별한 것 없는 글자인 시(是)를 가지고 특별한 뜻을 담는 발상의 전환이 눈길을 사로잡는 글이다.

여기에서 ‘이것(是)’은 읽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 해석을 달리할 수 있는 중의적(衆意的)이고 다의적(多義的)인 것을 암시한다. 마치 전라도 사투리 중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이면서 또한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는 말이기도 한 ‘거시기’를 소재로 삼아 글을 쓰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是)을 즐거워한다면 달팽이집처럼 작은 집에 살고 새끼줄로 띠를 두르고 쌀가루 하나 섞이지 않은 나물국을 먹는 것도 즐거워할 수 있다. 하물며 주인은 집이 비록 서너 칸밖에 안 되지만 비바람을 가릴 만하고, 의복이 허름하지만 추위와 더위를 막을 만하며, 밥이 거칠더라도 아침저녁 끼니를 이을 만하다. 이것(是)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무고(武庫)가 있던 곳으로 이사해서 집의 벽을 비단으로 꾸미고 날마다 만전(萬錢)이나 되는 진귀한 음식을 먹어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니 하물며 이 집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주인이 이것(是)을 즐거워할 수 있다면 훌륭하다. 그러나 이것(是)이란 정해진 것이 없으니 내가 거처하는 바가 모두 이것(是)이다. 지금 주인은 마침 곤궁함에 처해 있으므로 이것(是)을 즐기는 것을 훌륭하다고 한 것이다. 만약에 하루아침에 부유하게 되어서도 이것(是)을 즐긴다면 어찌 옳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주인이 별도로 이것(是)을 구하고 거처로만 이것(是)을 삼지 말았으면 한다.” 이가환, 『금대집(錦帶集)』, ‘낙시려기(樂是廬記)’ (이가환 지음, 박동욱 옮김,『금대집 - 붓으로 세상을 품다』, 한국고전번역원, 2014. p104〜105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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