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승계를 규제하는 국내 제도가 오히려 편법승계를 조장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경제연구원은 18일 ‘해외 대기업의 승계사례 분석과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포드·BMW·헨켈 등 100년 이상 장수 글로벌 대기업의 경우 다양한 제도 덕분에 합법적인 경영권 승계가 이뤄져왔다”고 주장했다.
국내 대기업 승계 원활화를 위해서는 규제완화 등 제도 설계를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포드의 경우 포드재단에 대한 주식(보통주)출연과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을 통해 상속세 부담을 완화하는 동시에 경영권을 유지했다.
차등의결권은 경영진이나 최대주주에게 보유 지분율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해 경영권 안정을 도모하는 제도다. 현재 미국·일본 등은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또 독일의 BMW는 다양한 회사형태를 보장하는 독일의 회사법을 활용해 유한합자회사 형태의 BMW 지분관리회사를 설립했다.
BMW는 자녀에게 직접 지분을 증여하지 않고 지분관리회사의 지분을 자녀에게 6년에 걸쳐 증여함으로써 상속증여세 납부 부담을 줄이고 안정적인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독일의 헨켈도 1985년 가족지분풀링협약을 체결해 승계과정에서 지분율 희석을 방지해왔다. 이를 통해 헨켈은 현재 의결권의 50% 이상을 가문이 확보하는 등 지배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올 수 있었다.
독일 법원도 헨켈 사례와 같은 가족 협약을 민법상 조합으로 법적 지위를 인정한 바 있다.
가족지분풀링협약(Family share-pooling agreement)은 가족 주주들이 주주총회에서 단결적 의결권 행사와 함께 풀링되는 주식 수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체결하는 가족 주주간 계약을 말한다. 협약 당사자 가족 주주들은 풀링에 있는 다른 가족 주주의 동의나 우선적 매입권 부여 없이 자신의 주식을 풀링 외부로 매각할 수 없다.
또 네덜란드의 하이네켄은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다층적 지주회사 구조를 활용했다.
다층적 지주회사구조는 지주회사에 대한 지분관리회사를 설립하고 해당 지분관리회사의 지분을 관리하는 또 다른 지분관리회사를 설립하는 등 중층의 구조를 만들어 가장 하위단계에 있는 지분관리회사 지분을 상속자가 소유하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하이네켄은 1952년 지분의 절반가량을 보유한 하이네켄 지분관리회사 A와 1973년 하이네켄 지분관리회사 A의 지분을 절반가량 소유하고 관리할 또 다른 지분관리회사 B를 설립한 후 지분관리회사 B의 지분의 80% 가량을 하이네켄 가족이 소유하는 방식으로 승계를 진행했다.
그 결과 하이네켄 가족은 의결권 과반을 실질적으로 보유하는 최대주주지만 산술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낮은 직접적 지분율(20%)을 가져 상속세 부담이 완화된 가운데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기업승계를 진행할 수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중소기업의 승계에 대해서는 가업상속공제제도를 통해 기업승계를 지원해주고 있지만 대기업의 경영권 승계는 상속세를 감면해주는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다.
게다가 상속증여세법 조항에 따라 공익재단 출연 주식 규제, 지배주주 주식 할증평가 등의 규제가 적용되고 있다.
가업상속공제제도는 10년 이상 경영한 중소기업의 경우 가업 상속재산 중 최대 200억원, 15년 이상은 최대 300억원, 20년 이상은 최대 500억원까지 공제 혜택을 주는 제도다.
이성봉 서울여대 교수는 “해외의 대기업 경영권 승계 사례를 보면 승계 과정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 거의 없다”며 “우리 대기업들도 기업승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