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용어 빗대 양반 사대부 사회를 비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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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용어 빗대 양반 사대부 사회를 비웃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8.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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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② 기묘(奇妙)와 기궤(奇詭)의 미학⑪
 

[한정주=역사평론가] ‘원통경(圓通經)’이라는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제목을 붙여 의도적으로 성리학의 규범과 관습을 전복·해체하는 이옥 또한 ‘기묘와 기궤의 미학’을 극한까지 추구한 글쓰기 전략을 선택해 글을 썼다.

‘원통(圓通)’이란 ‘걸림이 없이 원만하게 두루 통달한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키는 불교 용어다.

불교적 방식과 용어를 택해 자신의 가난과 추위를 묘사한 것도 기발하지만, 이 글에서 이옥은 불교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양반 사대부 사회를 향해 일부러 도발하는 듯한 글쓰기 전략을 취했다.

불경의 시작 부분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에서 차용한 ‘여시아상(如是我想: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한다)’을 글의 도입 부분에 쓴 것만 해도 이옥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다.

유학자나 성리학자들한테 어디 나를 비난하거나 매장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보라는 식의 글쓰기다.

“이와 같이 나는 생각해본다(如是我想). 대한(大寒), 소한(小寒) 날씨가 추울 때에 나는 한 곳에 머물면서 엉성하고 차가운 방에서 옷을 벗고 혼자 누웠다. 이때는 삼경인데 눈보라가 크게 몰아쳤다. 이때 아궁이의 불이 갑자기 온기가 없어지고, 이때 이불이 점점 모두 가볍고 얇아진다. 나는 이때 추위를 두려워하여 온몸이 떨려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고, 잠잘 수도 없었다. 그래서 기다란 몸은 문득 짧게 되고 목을 움츠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때 생각해 보았다. 서울 성안에 가난한 선비가 이 같은 밤을 당하여 사흘 동안 쌀이 없고, 열흘 동안 땔감이 없으며, 말똥과 쌀겨가 있을 뿐이다. 일체 세상의 사람을 따뜻하게 해줄 물건은 이미 저절로 오지 않고, 털 빠진 개가죽과 구멍 뚫린 부들자리만 있다. 휘장도 없고, 이불도 없고, 요도 없고, 모포도 없고, 병풍도 없고, 등잔도 없고, 깨진 화로에는 불씨도 없다. 그러나 이 방 안을 마주하여 이렇게 심한 추위를 견디며 이렇게 긴 밤을 지내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곧바로 죽을 마음으로 머리를 땅으로 향하게 하고 무릎은 가슴에 붙이고 귀를 젖가슴에 파묻고 등뼈를 활처럼 둥글게 하고 손은 새끼줄로 동여맨 듯이 하였다.

처음엔 젖먹이 양 같고, 또 잠자는 소 같고, 또다시 조는 고양이 같고, 또다시 묶인 사슴 같아 그 형세가 살았다고 할 수도 없었고 죽었다고 할 수도 없는 채 다만 한 가닥 온기가 목구멍 사이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였다.

가깝게는 오직 태양이 속히 나오기를 바라고, 멀게는 오직 화창한 봄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밖에 다시 한 점 다른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제팔빙상지옥(第八氷床地獄)이라 할 만한데, 그래도 사람이 활동하는 세상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거처하는 곳을 저곳에 비교해 보면, 바로 이곳은 따뜻한 방, 따뜻한 이불, 따뜻한 구들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니 문득 훈훈한 바람이 뱃속에서 일어나 방 안을 두루 가득 채워서 당장 내 방 안이 마치 활활 타는 큰 화로 같았다.

이제 나는 이러한 망상을 이용하여 곳곳에서 생각을 만들어낼 것이다. 뱃속이 텅 비게 될 때에는 거꾸로 삼순구식(三旬九食)하느라 달력을 보고서 불을 지피는 가난뱅이를 떠올릴 것이다. 집을 오래 떠나 있을 때에는 거꾸로 만리타향에서 십 년이 넘도록 귀향하지 못하는 나그네를 떠올릴 것이다. 너무나도 잠이 몰려올 때에는 거꾸로 파루(罷漏)를 알리는 쇠북이 울리자 신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출근하는 벼슬아치를 떠올릴 것이다.

이제 막 과거에 떨어졌을 때에는 거꾸로 백발이 성성하도록 경서를 공부했으나 한 번도 합격하지 못한 궁상맞은 선비를 떠올릴 것이다. 외로움이 사무칠 때에는 거꾸로 아무도 없는 쓸쓸한 공산에서 홀로 앉아 염불하는 늙은 스님을 떠올릴 것이다. 음욕이 솟구칠 때에는 어쩔 도리가 없어 쓸쓸한 집에서 홀로 자는 내시를 떠올릴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 일어나다 수만 가지 생각으로 번지고, 나중에는 아승지겁(阿僧祗劫: 헤아릴 수 없이 지극히 긴 시간)의 생각이 떠오르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이러한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 목마른 자가 제호탕(醍醐湯: 우유로 만든 음료)을 마신 듯하고, 병자가 대의왕(大醫王: 부처)이 만든 좋은 약을 복용한 듯 하리라. 이것을 일러 나무관세음보살의 버들가지 호리병 속에 든 감로법수(甘露法水)라 한다.” 이옥, 『잡제(雜題)』, ‘원통경(圓通經)’ (안대회 지음,『고전 산문 산책』, 휴머니스트, 2008.에서 인용)

이러한 글들은 분명 시대와 불화하는 글쓰기였지만 동시에 시대를 넘어선 글쓰기였다.

그런 점에서 ‘기묘(奇妙)와 기궤(奇詭)의 미학’은 비록 시대와 불화하고 세상의 비난을 사고 혹평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마땅히 옛사람이나 다른 사람과는 차별화되는 개성미 넘치는 방식과 내용으로 글을 짓고자 했던 치열한 작가 정신의 산물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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