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논리·견문과 지식의 울타리 바깥으로 이끄는 힘…‘호기심과 상상력’
상태바
이성과 논리·견문과 지식의 울타리 바깥으로 이끄는 힘…‘호기심과 상상력’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9.25 11: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③ 동심(童心)’의 미학⑦
▲ 신광현의 ‘아이와 강아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영처의 철학’ 속에 동심의 미학을 담았던 이덕무가 남긴 글 속의 ‘동심(童心)의 세계’를 찾아가보자.

먼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아무런 볼품도 없는 까치집에 ‘상량문’을 짓는 것만 보아도 어린아이의 소꿉놀이 마냥 글쓰기를 즐겼던 이덕무의 ‘문장 철학’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삼호(三湖: 지금의 마포)의 외삼촌댁에는 큰 산수유나무가 있었다. 내 나이 19살인 기묘년(1759년) 겨울 11월에 까치가 그 산수유나무 꼭대기에 집을 지었다. 그런데 까치는 집을 절반가량 짓다가 가버리고 오지 않았다.

그때 외삼촌이 ‘네가 집을 지을 때 적는 상량문(上樑文)을 지으면 까치가 집을 완성하지 않을까?’ 하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내가 붓을 들어 상량문을 지었다. 그 글이 익살스러웠으나 까치가 마침내 집을 완성했다. 까치가 과연 내 글을 기다렸던 것일까? 나는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고 한다.

별세계가 따로 없다. 강 언덕의 기둥 하나가 허공에 의지하고 있구나. 신선이 산다는 훌륭한 집이 아닌가? 내려다보니 온 세상이 아른아른 아홉 점의 연기처럼 작아 보이는구나. 그쳐야 할 곳에서 그쳤으니 즐거움이 한없이 크다. 집주인은 은하수를 가득 메우고, 둥근 돌로 변한 새의 후손이로다. 궁궐 전각 앞에 선 동방삭은 까치를 보고 바람이 불 것을 미리 알았고, 옥에 갇혀 있던 여경일은 기쁘게 지저귀는 까치 소리를 듣고 자신이 곧 풀려날 수 있음을 알고 마음을 놓았네.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재잘거리며 진흙을 물어다 나르는 제비를 비웃고, 텅 빈 성에서 재잘거리며 곡식 부스러기나 쪼아대는 참새를 하찮게 여기네. 때를 알아 기쁜 소식 전해 주니, 사람들이 절로 어여삐 여기네. 불길한 방향과 반대로 집을 지으니 타고난 천성이 지혜롭구나.

곧고 굵고 높이 자란 큰 나무에 오래도록 터를 닦아 내려온 집안이니 화려하게 훨훨 날아 높은 곳을 밟고, 큰 나무의 남은 풍모이니 어찌 호락호락 땅으로 내려가겠는가! 그렇기에 흙도 아니고 물도 아닌 언덕 위에 편안히 거처할 누각을 지었구나. 옛 시대의 법식대로 나무로 얽어 집을 짓고,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 문을 세웠구나. 어찌 땅 아래 백성들의 능멸을 걱정하겠는가?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하며 동남방의 양지바른 곳에 집터를 골라, 좋은 때와 길한 날에 집을 지었네. 좌우사방이 모두 법도에 맞고 위는 기둥이며 아래는 집이 되니, 무엇 하러 유명한 목수의 손을 빌려 번거롭게 하겠는가. 빛나고 아름다워 자손이 대를 이어 물려받을 만하니 부부가 단둘이서 부르고 화답하며 즐거이 집을 짓는구나.

봄·여름·가을·겨울의 아름다운 경치를 모두 독차지하니 까마귀는 뛰고 토끼는 달아나는구나. 봉황은 춤추고 용은 날아오르는구나. 위로는 하늘 높이 솟아 물 아래에 비추는 누각이 저 멀리 있는 듯하고, 옆으로는 사해(四海)에 퍼져 용 모양의 들보와 달처럼 둥근 창문은 우러러 더욱 높네. 달은 휘영청 밝고 별은 듬성듬성 보이는데 어찌 집 잃은 탄식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바람이 몰아친다 해도 아무 근심이 없구나. 한가롭게 노니는 기러기도 화살과 그물이 무서워 자취를 감추고, 총명하고 슬기로운 앵무새도 새장 속에 갇혀 울며 속을 태우네. 잡혀 죽거나 갇혀 사는 저들의 가련한 신세를 보며, 우리 행복을 지킬 수 있기를 이처럼 굳게 하노라.

작은 나뭇가지에 집을 지어서 알을 깨뜨리고 새끼가 다치는 뱁새에 비교할 바가 아니고, 미끈한 대나무에 오르려고 꼬리를 붙이고 머리를 구부리며 애쓰는 메기보다 낫구나. 무릎을 펼 만큼 넓으니 모기 눈썹이나 달팽이 뿔에 비교할 바가 아니고, 머리를 부딪칠 만큼 나지막하지도 않구나. 사납고 포악한 올빼미에게 공격당할 걱정이 없고, 하루살이로 인한 흔들림을 근심할 필요도 없구나. 나는 재주는 벌레나 곤충처럼 작지만 뜻은 천하를 나는 대붕과 같이 크다. 이미 좋은 이웃이 되었으니 바람 부는 밤에는 고상한 풍취를 기리며 계수나무 전각에 오르려고 아침저녁으로 좋은 소식을 기다린다.

상량한 후에 비둘기에게 빼앗겨 집을 잃지 말고 메뚜기처럼 많은 자손을 낳기를 바라노라. 난새처럼 멈추고 고니처럼 그치며 봉황의 깃털처럼 아름다운 풍채를 길이 전하고 곰처럼 당기고 새처럼 펴서 아무 병 없이 오래도록 잘 살기를 바라노라.” 이덕무, 『청장관전서』, ‘까치집 상량문(鵲巢上樑文)’

▲ 김홍도의 ‘서당’ 중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더욱이 이덕무는 어린아이의 ‘지혜와 식견惠識’이 때로는 어른은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경지에 들게 한다고 탄복하면서 자신의 아우 정대의 사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어린 아우 정대(鼎大)가 이제 겨우 9세인데 타고난 성품이 매우 둔하였다. 그가 갑자기 말하기를 ‘귀속에서 쟁쟁 우는 소리가 난다’ 하기에 내가 묻기를 ‘그 소리가 무슨 물건과 같으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 소리가 동글동글한 별 같아서 보일 것도 같고 주울 것도 같다’고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형상을 가지고 소리에 비유하니 이것은 어린아이가 무의식 중에 타고난 혜식(慧識)이다. 예전에 어린아이가 별을 보고 달 가루라고 하였다. 이런 등의 말은 예쁘고 고와서 때묻은 세속을 벗어났으니 속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어린아이의 소꿉놀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면 인간사와 세상 만물 모두가 기이한 구경거리이다. 글쓰기를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여기면 세상 그 어떤 것도 글쓰기의 중요한 소재가 되고 창작의 원천이 된다. 그러한 글 속에도 세상과 사물의 지극한 이치와 조화를 담을 수 있고, 천지(天地)의 장관과 고금(古今)의 기이함을 모두 갖출 수 있다.

“어린아이가 울고 웃는 것과 시장에서 사람들이 사고파는 것을 또한 익히 보고 그 무엇을 느낄 수 있고, 사나운 개가 서로 싸우는 것과 교활한 고양이가 재롱을 떠는 것을 조용히 관찰하면 지극한 이치가 이들 속에 있다.

봄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것과 가을 나비가 꽃 꿀을 채집하는 것에는 하늘의 조화가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많은 개미들이 진을 이루고 행진할 때 깃대와 북을 빌지 않아도 절제가 잡혀 균형을 이루고 있고 일천 벌의 방은 기둥과 들보가 없는데도 칸 사이의 간격이 저절로 고르게 되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지극히 가늘고 적은 것이지만 그곳에는 너무도 묘하고 너무도 무궁하게 조화된 것이 있다. 대저 천지의 높고 넓은 것과 고금의 오고 가는 것을 보면 장관이고 기이하다 할 것이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내가 전에 서리(霜) 조각을 보니 거북 무늬 같았고 근자에 또 보니 어떤 것은 비취 털 같기도 했다. 또 어떤 것은 아래에 작은 줄기가 있는데 매우 짧고 가늘고 위에는 좁쌀 같은 것이 모여 있는데 반드시 여섯 개가 모두 뾰쪽하게 곧게 서 있었다.

대저 기와나 나무에 붙은 것은 심히 작고 가늘며 마른 풀에 붙은 것은 아주 분명하고, 밖에 드러나 있는 해진 솜이나 베에 붙어 있는 것은 하나하나 셀 수 있어 그 기묘한 모양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항시 자세히 구경할 적마다 가슴 속의 묘한 생각이 마치 누에가 실을 뽑아내는 것과 같다.

눈과 우박은 공중으로부터 이미 형상을 이루어 내려오기 때문에 낮과 밤을 논할 것이 없다. 그런데 서리와 성애는 기운이 겨우 물건에 붙으면 바로 모양을 이루어 그 상태로 엉기니 이는 다만 밤을 타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또 서리는 오직 밖에 드러난 곳에만 생기니 기운이 곧장 내려와서 그러한가. 성애는 서리와 아주 달라서 처마 사이의 깊숙하고 은밀한 곳이라도 나무 조각이나 갈대,혹은 뒤섞인 터럭, 엉킨 실이 있으면 그 곳에 꽃이 생긴다.

대개 안개 같은 기운이 천지에 가득 차 있어서 넘치고 흩어져 비록 처마 사이라도 기운이 통할만한 곳에는 들어가서 꽃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도 또한 한 가지 기이한 구경거리이다.” 이덕무,『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또한 어린아이의 마음과 시선으로 세상사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것이 호기심과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사람은 누구나 어렸을 때는 호기심이 넘치고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러나 견문과 지식이 점차 쌓여가다 보면 이성적 사유와 논리적 사고에 젖어들게 된다.

그래서 세상사와 인간사를 이성적·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성숙한 지성으로 여기는 반면 여전히 호기심이 넘치고 상상력이 풍부하기라도 하면 철이 덜 든 좀 모자라거나 미성숙한 사람인양 취급한다.

그러나 사실 견문과 지식에 눈과 마음이 현혹되어 오히려 ‘보이지만 보지 못하는’ 장님 신세가 되고 만 것을 알지 못한다.

이성과 논리, 견문과 지식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것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未知) 혹은 미답(未踏)의 세계를 보려고 하지도 않고 볼 수도 없다. 마치 ‘우물 속에 갇힌 개구리’가 우물 속에서 본 하늘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하늘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를 알 수 있듯이 이성과 논리, 견문과 지식의 ‘울타리’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이때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마음과 시선, 즉 호기심과 상상력이다.

그것은 눈을 뜬 장님이 다시 눈을 감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자신의 감성과 정신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견문과 지식, 이성과 논리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동심, 즉 천연(天然)의 본성이자 최초의 본심(本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