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감성 돋보이는 유득공의 한양 진경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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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감성 돋보이는 유득공의 한양 진경 산문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6.01.22 08: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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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⑧
▲ 탑동연첩. <자료=서울역사박물관>

[한정주=역사평론가] 앞서 소개한 대로 『경도잡지』를 따로 저술할 만큼 한양의 자연 풍경과 민간의 풍속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유득공이 이덕무와 박지원 등과 어울려 봄이 한창 무르익은 한양도성의 구석구석을 유람하면서 기록한 ‘춘성유기(春城遊記)’ 또한 18세기 당시 한양의 진경(眞景)을 묘사한 걸작 산문이다.

“경인년(庚寅年) 3월 3일, 연암(박지원)과 청장관(이덕무)과 어울려 삼청동으로 들어가 창문(倉門) 돌다리를 건너 삼청전(三淸殿)의 옛터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내버려두어 황폐해진 밭이 있었는데, 세상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자리를 잡아 앉았더니 녹색 물이 옷을 물들였다.

청장관은 풀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 내가 이런 저런 풀을 뜯어 물어보았다. 청장관이 대답하지 못하는 풀은 없었다. 이에 수십 종의 풀이름을 기록했다.

청장관은 어떻게 그토록 해박하고 고상할까? 해질녘에 술을 사서 마셨다.

다음날에는 남산에 올라갔다. 장흥방(長興坊)을 거쳐서 회현방(會賢坊)을 뚫고 걸어갔다. 남산 부근에는 옛적 재상들이 거처했던 집이 많다. 무너진 담장 안에는 늙은 소나무와 전나무가 당당하게 남아 있었다.

높은 언덕에 올라가 시험 삼아 바라보았다. 백악(白岳 : 북악산)은 둥글고 뾰족하게 서 있는 형세가 마치 모자를 뒤집어 쓴 모양과 같다. 도봉산은 삐죽삐죽 솟은 형세가 마치 투호 병에 꽂혀 있는 화살이나 필통에 붓이 놓여 있는 모양과 같다. 인왕산은 마치 사람이 인사하면서 두 손을 놓았지만 그 어깨는 아직 구부정하게 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삼각산은 사람의 무리가 공연을 관람하는 자리에 키가 큰 사람 하나가 등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는데, 여러 사람의 갓이 그 사람의 턱에 닿아있는 모습과 같다.

한양도성 안의 집들은 마치 검푸른 빛의 밭을 새로 갈아서 반짝반짝하는 모양이고, 큰길은 마치 기다란 하천이 들판을 갈라놓고 굽이굽이마다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형세다. 사람과 말은 그 하천 속에서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새우와 같다.

도성의 가구 수는 8만 호이다. 그 속에서 이 순간 함께 노래하고, 함께 울고, 함께 술 마시고 밥 먹고, 함께 장기나 바둑을 두고, 함께 칭찬하고, 함께 헐뜯고, 함께 어떤 일을 하고, 함께 어떤 일을 도모하고 있다. 높다란 곳에 있는 사람에게 그 모습을 관람하게 한다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또한 그 다음날에는 태상시(太常寺)의 동쪽 누대에 올라갔다. 육조(六曹)의 누각, 궁궐의 하천 가 버드나무, 경행방(慶幸坊)의 백탑(白塔), 동대문 밖 아지랑이가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낙산(駱山) 일대였다. 모래는 하얗고 소나무는 푸르다. 그 밝고 고운 모습이 마치 그림과 같다.

여기에 다시 작은 산 하나가 마치 엷은 먹물 색의 까마귀 머리와 같이 낙산 동쪽에 솟아 있다. 그 산이 구름 속으로 보이는 양주(楊州) 지방의 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문득 들었다. 이날 밤 나는 술에 아주 취해 서여오(徐汝五 : 서상수)의 집의 살구나무 꽃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

다시 그 다음날에는 경복궁의 옛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궁궐의 남문(南門) 안에는 다리가 있다. 다리 동쪽에는 천록(天祿) 석상 두 개가 있고 다리 서쪽에는 한 개가 있다. 그 천록의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듯 조각이 훌륭하다. 남별궁(南別宮)의 뒷마당에는 등에 구멍이 뚫린 천록이 한 마리이다. 남문 다리에 있는 천록과 꼭 닮았다. 필경 다시 서쪽에 있던 천록 석상을 옮겨 왔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갔다. 근정전(勤政殿) 옛터가 보였다. 근정전의 섬돌은 3층으로 동쪽과 서쪽 모서리에는 암컷과 수컷 개의 석상이 놓여있다. 암컷 개의 석상은 새끼를 한 마리 안고 있다. 신승(神僧) 무학대사가 남쪽 왜구가 침략하면 짖도록 만든 석상이다. 세상에는 개가 늙으면 그 새끼가 뒤를 이어 짖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임진년의 화마(火魔)를 모면하지 못했다. 저 돌로 만든 개의 죄라고 해야 할까? 전해오는 이야기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근정전의 좌우에 놓인 돌로 만든 이무기의 위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다. 나는 최근에『송사(宋史)』를 읽었다. 그래서 그 웅덩이가 제왕의 좌우에 자리해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연지(硯池)라는 사실을 알았다.

근정전을 돌아서 북쪽으로 갔다. 일영대(日影臺)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영대를 돌아서 서쪽으로 갔다. 경회루(慶會樓)의 옛터가 나타났다. 이 옛터는 연못 가운데 있다. 부서진 다리가 있어서, 그것을 통해 경회루의 옛터로 갈 수 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건너자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누각의 기둥과 주춧돌은 높이가 세 길 정도 되었다.

무릇 기둥이 48개 인데, 그 가운데 여덟 개는 부서졌다. 바깥 기둥은 네모진 모양이고, 안쪽 기둥은 둥근 모양이다. 기둥에는 구름과 용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말한 이른바 세 가지 장관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연못의 물은 푸르고 맑아서 살살 부는 바람에도 잔물결이 일었다. 연꽃송이와 가시연 뿌리가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고 흩어졌다가 합해졌다. 작은 붕어들이 물이 얕은 곳에 모여서 거품을 뿜고 노닐다가 사람의 발자국 소리라도 듣게 되면 얼른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연못에는 두 개의 섬이 있다. 그곳에 심어놓은 소나무가 쭈뼛 솟은 채 무성한 잎을 뽐내고 있었다. 소나무 그림자가 물결을 갈랐다. 연못 동쪽에는 낚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연못 서쪽에는 궁궐을 지키는 내시가 손님과 어울려 과녁을 향해 활을 쏘고 있었다.

동북쪽 모서리의 다리에 의지해 물을 건넜다. 풀은 모두 죽대의 뿌리고 돌은 모두 오래된 주춧돌이다. 주춧돌에는 웅덩이가 있는데 기둥을 꽂은 곳 같아 보였다. 빗물이 그 웅덩이를 채우고 있었다. 이따금 마른 우물이 보였다.

북쪽 담장 안에는 간의대(簡儀臺)가 자리하고 있었다. 간의대 위에는 방옥(方玉)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간의대 서쪽에는 검은빛이 나는 돌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그 길이가 족히 대여섯 자는 되고 넓이는 세 자 가량 되었는데 연달아 물길을 뚫어놓았다. 간의대 아래 돌은 마치 벼루 같아 보이기도 하고, 모자 같아 보이기도 하고, 마치 한쪽이 터진 궤(櫃) 같아 보이기도 한다.

무엇을 하는 것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간의대는 뛰어나게 높고 시원하게 트여서 북촌의 꽃과 나무를 조망하기에 알맞다.

동쪽 담장을 빙 돌아 걸었다. 삼청동의 석벽(石壁)이 구불구불 모습을 나타냈다. 담장 안의 소나무는 모두 열 길이나 되고 황새와 참새와 해오라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 빛깔이 순백(純白)인 새도 있고, 거무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 새도 있고, 연한 붉은빛이 도는 새도 있었다. 머리에 볏을 드리운 새도 있고, 부리가 마치 수저와 같은 새도 있고, 꼬리가 마치 솜과 같은 새도 있었다. 알을 품고 엎드려 있는 새도 있고,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 들어오는 새도 있었다. 서로 다투기도 하고 어울려 노닐기도 하는데 그 소리가 시끌벅적하다.

소나무 잎은 모두 시들어 있었다. 소나무 아래에는 떨어진 깃털과 빈 새알껍질이 가득했다. 우리의 도성 유람에 따라 나선 윤생(尹生)이 돌팔매질을 해 순백의 빛깔을 지닌 새 한 마리의 꼬리를 맞추었다. 새떼가 놀라 일제히 날아오르자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가득 덮은 눈(雪)과 같았다.

서남쪽으로 걸어가자 채상대(採桑臺)의 비석이 놓여 있었다. 정해년(丁亥年)에 임금님께서 몸소 누에를 치던 곳이다. 그 북쪽에는 폐허가 되어버린 못이 있다. 내농포(內農圃)에서 벼를 심어 농사짓던 곳이다.

위장소(衛將所)에 들어가 찬 물을 퍼서 마셨다. 마당에는 수양버들이 많았다. 수양버들에서 떨어진 버들섬이 비로 쓸어야 할 정도로 수북했다. 그곳의 선생안(先生案)을 빌려서 보았다. 호음(湖陰) 정사룡이 첫 머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편액 위에 또한 정사룡이 지은 시가 있었다.

다시 궁궐도(宮闕圖)를 꺼내 살펴보았다. 경회루는 무릇 서른다섯 칸이었다. 궁궐의 남문(南門)은 광화문(光化門)이다. 북문(北門)은 신무문(神武門)이다. 서문(西門)은 연추문(延秋門)이다. 동문(東門)은 연춘문(延春門)이다.”  유득공, 『영재집(泠齋集)』 ‘봄날 도성(都城)을 유람하다(春城遊記)’

1770년 나이 23세가 되는 봄날 며칠 동안 삼청동, 남산, 경복궁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노닌 한양의 명승지 풍경을 유득공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표현한 진경 산문이다. 특히 남산의 높은 언덕에서 바라본 백악(북악), 도봉산, 인왕산, 삼각산(북한산)에 대한 형상 묘사는 절묘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아직 복구하지 못한 채 폐허로 남아 있는 경복궁의 여러 유적의 실경(實景)과 석벽(石壁)을 따라 삼청동을 거닐면서 담장 안 소나무에 앉아있는 황새와 해오라기의 다채로운 모습을 기묘하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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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식 2018-01-09 16:36:09
경복궁의 서문이름과 동문이름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저도 확인 중이라 정정은 못하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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