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농주의 경제학의 대부 유형원…③미래 경제 프로젝트 ‘토지공유제와 균전론’
상태바
중농주의 경제학의 대부 유형원…③미래 경제 프로젝트 ‘토지공유제와 균전론’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6.22 08: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의 경제학자들] 남인 실학파와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토대 개척한 대 사상가
▲ 김윤보의 『풍속도첩』 중 ‘소작료 납입’. 19세기 말. 종이에 수묵 담채. 개인 소장.

[조선의 경제학자들] 남인 실학파와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토대 개척한 대 사상가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 초기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룬 과전법이나 세조 때 시행되어 1557년(명종 12년) 폐지된 직전법은 토지의 국가 소유를 원칙으로 한 공전제(公田制)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6세기 들어 무너지기 시작한 공전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전란을 거치면서 양반 지주 계층의 토지 집중 및 독점과 지주-전호(소작) 관계에 기초한 사전(私田)의 확산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유형원은 이와 같은 사회구조적 변동이 낳은 17세기 조선 사회의 모습을 “부자의 토지는 끝을 모를 정도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다. 부익부 빈익빈으로 말미암아 이익을 독차지한 세력들이 토지를 모조리 소유한 반면 백성들은 처자를 이끌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거나 머슴살이 신세가 되고 만다”고 표현했다.

유형원은 이처럼 양반 지주 계층의 대토지 소유와 백성들의 소작농으로의 전락이 나라 경제와 국방을 뒤흔드는 최대의 위협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모든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하고 실제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재분배하는 토지 개혁만이 경제와 국방을 복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유형원의 토지 개혁론은 한 마디로 ‘토지공유제와 균전론’으로 표현할 수 있다. 『반계수록』 첫 머리에 토지 개혁에 대한 유형원의 근본 구상이 나타나 있다. 그는 토지를 무제한 사적으로 소유하는 토지겸병(토지 집중 및 대토지 소유)이야말로 정치를 어지럽히고 경제를 파탄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았다.

“토지제도가 허물어지고 사적으로 무제한 토지를 겸병(兼倂)함에 따라 나라의 모든 폐단이 생겨났다. 아무리 훌륭한 임금이라고 할지라도 토지제도를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라와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토지는 천하의 근본이다. 근본이 제대로 서면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된다. 그러나 근본이 제대로 서지 못하면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고 만다. 정치의 기본 요체를 깨우치지 못하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이 하는 일의 이로움과 해로움 그리고 얻음과 잃음이 모두 토지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반계수록』 서문(序文)

또한 유형원은 “공전(公田)은 공적이고 균등한 반면 사전(私田)은 사적이며 편중된다”고 보았다. 공전은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며 항상적으로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반면 사전은 양반 지주만 살찌우고 백성들의 삶은 파탄으로 내몬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유형원이 주장한 공전이란 다름 아닌 양반 지주 계층의 토지겸병 폐지와 토지공유제의 실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양반 지주 계층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몰수해 국가에서 소유한 다음 다시 일정 규모의 면적으로 나누어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자는 것이다.

이때 나라에서 몰수해 소유한 토지를 재분배하는 구체적인 기준과 방법을 정한 제도가 바로 ‘균전론(均田論)’이다.

유형원은 완전한 토지공유제에 기반을 둔 정전법(井田法)을 근간으로 한 농업경제체제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 보았다. 정전법이란 모든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한 다음 일정 규모의 토지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 한 다음 여덟 가구가 고루 나누어 경작해 생계를 유지하고 중앙의 나머지 부분만 공동 경작하여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하도록 한 토지제도다.

유형원은 이 제도가 토지공유제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과 이상을 가장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유형원은 조선 사회가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로 유지되는 왕조 체제라는 현실 또한 외면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상적인 토지제도보다는 현실적인 경제 개혁을 통해서만 토지겸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이상적인 제도와 현실적인 고민의 한복판에 선 채 유형원이 세상에 내던진 토지 개혁 방안이 바로 ‘균전론’이었다.

균전론은 정전법과 마찬가지로 모든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하는 토지공유제를 원칙으로 해 실시한다. 그런 다음 토지를 재분배하는데, 이때 유형원이 가장 우선시한 경제 정책은 ‘자영농민의 확산과 육성’이었다.

그는 양민이든 노비든 상관없이 농민은 최소한의 생계유지와 납세·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토지를 균등하게 지급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최소한의 토지란 1호(戶)당 1경(頃) 곧 40마지기다. 그는 이 정도의 토지 면적을 가져야만 농민 한 가구가 자립해서 농사를 짓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유형원은 4경(頃)당 1명은 병사가 되고 나머지 3명은 비용을 부담하도록 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주장했다. 유형원이 균전론을 통해 토지 개혁뿐만 아니라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균전론은 근본적으로 경작자인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개혁안이었다. 그러나 이 토지 개혁론은 사·농·공·상이라는 봉건적 계급 위계와 신분 질서의 울타리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유형원은 왕족에 대해서는 10~12경, 현직 관리에 대해서는 품계에 따라 6~12경,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유생)에 대해서는 2~4경, 상공인에게는 농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 무당과 승려 그리고 여자들에게는 토지를 주지 않는다.

적지 않은 사회경제사가들은 신분과 계급에 따른 토지의 차등 분배를 두고 유형원 토지 개혁론의 한계를 지적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과거 역사를 지나치게 꿰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당시의 시각에서 볼 때 유형원의 경제 개혁론은 개인의 무제한 토지 소유와 지배계층인 양반 지주의 토지겸병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기와 모순을 뛰어넘고자 한 혁명적인 방안이었다. 또한 그것은 토지공유제와 경자유전을 기반으로 해 국가 경제를 복원하고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혁신적인 미래 경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