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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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4.08.25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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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저마다 상이한 경험을 통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간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공간화한 기억이다. 추억은 벌집 같은 공간 속에 특정의 시간들을 압축하고 공간화한다.

변두리의 허름한 단칸 셋방과 엽기적인 살인사건, 빌딩 지하주차장과 검은 돈다발, 지하철 안과 무개념녀, 극장과 100만 관객 달성의 흥행 기록 등등.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지적했듯이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그러나 주변의 공간 대부분은 굳어진 관념이나 진부해진 이미지들에 갇혀 공간 본래의 성격과 표정은 사라지고 대상화되고 있다.

이성 혹은 판단력이라고 부르는 모든 정신적 작용의 출발점이 공간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된다고 전제한 『겹겹의 공간들』(을유문화사)의 저자는 공간을 낯설게 보고 공간에 겹겹이 드리워진 이미지들을 걷어낸 뒤 텅 빈 공간 자체의 표정을 살펴 공간의 가치를 되새긴다.

우리의 삶과 너무 밀착돼 있어 잊어버린 공간의 진짜 모습을 찾는 것이다.

이때 저자는 박제화된 일상 공간을 낯설게 살피고 공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의외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생활공간처럼 흔히 접하는 곳 ‘여기’, 좀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공간 ‘저기’, 추상적이거나 접근하기가 꺼려지는 공간 ‘거기’로 구분해 공간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중에는 쇼윈도나 로또방처럼 욕망의 공간도, 서울역이나 지하철처럼 익명의 공간도, 외딴 방이나 농성장처럼 고독한 공간도, 아궁이나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공간처럼 형이상학적인 공간도 있다.

 
특히 편의점, 커피숍, 지하철, 서울역, 극장, 공항, 로또방 등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가 비장소(non-place)라고 분류한 공간들과의 소통도 빼놓지 않는다.

똑같은 풍경, 유사한 표정을 가진 이들 장소는 잠시 거쳐 가는 곳일 뿐으로 진정한 교류나 역사, 문화가 축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비장소들은 나날이 늘어나 삶의 일부가 되고 있다.

이곳들의 내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 없는 공간들은 단편적이나마 타인을 만나는 공감각적 공간이 되기도 하고 어려운 이웃의 일터가 되기도 하고 도시에 온기를 부여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공간의 표정을 읽어내고 목소리를 감지함으로써 무기질의 공간이 생기를 띠고 입체화되고 일반 명사의 장소에서 고유 명사의 장소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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