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욕망이 만든 신화가 감춘 삶의 진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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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욕망이 만든 신화가 감춘 삶의 진실들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11.14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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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⑰ 일연 『삼국유사』…신화, 욕망하는 권력의 세계Ⅳ
『삼국유사』 「기이 제2」 ‘제48대 경문대왕’에 기록되어 있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 [그림='배추도사 무도사']
『삼국유사』 「기이 제2」 ‘제48대 경문대왕’에 기록되어 있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 [그림='배추도사 무도사']

[한정주=고전연구가] 앞서 살펴본 건국 신화 못지않게 권력의 욕망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를 거론한다면 단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를 꼽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화와 설화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 중 하나인 이 설화는 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는 『삼국유사』 「기이 제2」 ‘제48대 경문대왕’에 기록되어 있다. 이 설화에서 경문왕을 둘러싼 기이한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기이한 이야기 : “왕의 침전에는 매일 저녁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는데 대궐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무서워 몰아내려 하니 왕이 말했다.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잠들 수가 없으니 몰아내지 마라.’ 그래서 매일 잠잘 때면 뱀이 혀를 내밀어 왕의 가슴을 덮었다.”(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08, p179)

●두 번째 기이한 이야기 : “왕은 즉위한 후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자랐다.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직 복두장 한 사람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토록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복두장이 죽을 때가 되자 도림사 대숲 가운데로 들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대나무를 향해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08, p180)

경문왕을 둘러싼 기이한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권력의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경문왕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경문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던 왕이다.

당시 신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진골 귀족 세력은 경문왕의 개혁 정책 때문에 오랜 세월 누려온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진골 귀족 세력은 강하게 반발하며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경문왕의 개혁을 좌초시키려고 했다. 경문왕 설화는 이 과정에서 진골 귀족 세력이 만들어 민간에 퍼뜨린 이야기이다.

“왕의 침전에 매일 저녁 수많은 뱀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는 무슨 의미일까. 경문왕과 측근 신하들이 밤마다 모여 함께 개혁 정책을 도모했다는 뜻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진골 귀족 세력에게 경문왕 주변에 모여든 측근 개혁 세력은 마치 ‘뱀’과 같이 사악한 무리였을 것이다.

“대궐에서 알아보는 사람”은 바로 진골 귀족 세력을 의미한다. 이들은 경문왕 주변의 측근 개혁 세력을 어떻게든지 궁궐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경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의 건의를 받아주지 않았다. 경문왕에게 측근 개혁 세력은 진골 귀족 세력에 맞설 거의 유일한 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잠들 수 없으니 몰아내지 말라”는 경문왕의 말은 곧 이러한 상황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경문왕이 “매일 잠잘 때면 뱀이 혀를 내밀어 왕의 가슴을 덮었다”는 이야기 역시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다. 경문왕 주변의 측근 개혁 세력이 마치 사악한 뱀이 혀를 놀리는 것처럼 요망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서 왕의 마음을 가렸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골 귀족 세력은 풍자를 빙자한 설화를 만들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경문왕과 측근 개혁 세력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방식으로 모욕하고 공격한 것이다.

“경문왕이 즉위한 후 갑자기 귀가 당나귀 귀처럼 자랐다”는 이야기에도 진골 귀족 세력의 추악한 의도가 감춰져 있다.

경문왕의 귀가 사람의 귀가 아닌 당나귀 귀로 변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진골 귀족 세력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문왕의 귀는 더 이상 사람의 귀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경문왕이 개혁 정책을 추진하려고 할 때마다 진골 귀족 세력이 그것을 좌초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반대의 말을 왕에게 올렸겠는가. 그때마다 경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의 말을 단호하게 물리쳤을 것이다. 사람의 귀를 가졌다면 반드시 자신들의 말을 알아들을 텐데 경문왕의 귀는 사람의 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의 말을 결코 알아듣지 못한다는 진골 귀족 세력의 원망과 증오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바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설화인 것이다.

그런데 1200여년 전 신라의 진골 귀족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경문왕과 측근 개혁 세력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모욕하고 공격하는 방식은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정치 현상이다.

예를 들어 일부 극우보수 세력은 지금도 특정지역을 ‘홍어’로, 또는 세월호 희생자를 ‘어묵’에 비유해 조롱하고 비하하지 않는가. 또한 모 정당이 대통령을 ‘벌거벗은 임금님’에 비유해 조롱하고 또한 대통령 지지 세력을 ‘달창’이라고 비하하고 모욕하는 일도 있지 않았는가. 이른바 풍자를 빙자해 특정 세력·지역·인물을 조롱·비하·모욕하는 방식으로 공격하는 행위는 요즈음에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짧은 시간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기득권 세력이 개혁 세력을 조롱·비하·혐오·증오·모욕·공격하기 위해 거짓으로 만든 수많은 스토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왜 이토록 열정적으로 조롱과 비하, 혐오와 증오로 가득한 거짓 이야기를 창작해 퍼뜨릴까. 거기에는 반공과 독재 그리고 재벌 중심의 경제를 미화·옹호하고자 하는 정치-경제 권력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또한 그 속에는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반공과 독재·재벌 중심의 경제를 통해 권력을 쌓고 이익을 취해온 세력이 어떻게든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추악한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럼 신화 속 권력의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는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 현실의 삶 속에서 권력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고 우리의 정신을 어떻게 지배하며 또한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화가 단순히 신비하고 기이한 옛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삶을 성찰하고 통찰하는 힘이 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권력의 욕망이 어떻게 신화(혹은 설화)를 제작하고 창작하는지 살펴봤다. 그렇다면 권력의 욕망 외에 신화(혹은 설화) 창작의 다른 동인(動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민중의 욕망’이다. 신화 속에는 권력의 욕망 못지않게 ‘욕망하는 민중의 삶’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민중이 만든 신화(혹은 설화)는 권력의 그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삶의 욕망과 욕구를 보여준다. 민중의 욕망이 신화(혹은 설화)를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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