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칠 것인가 vs 투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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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칠 것인가 vs 투쟁할 것인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24.01.22 0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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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⑲ 허먼 멜빌 『모비 딕』…누구나 마음속 ‘괴물’과 싸운다Ⅲ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을 원작으로 한 그레고리 펙 주연의 흑백영화 백경 속 에이해브 선장.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을 원작으로 한 그레고리 펙 주연의 흑백영화 <백경> 속 에이해브 선장.

[한정주=고전연구가] 우리는 에이해브 선장처럼 누구나 자기 마음 안에 ‘괴물’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모비 딕’이라는 존재는 에이해브 선장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육신과 영혼을 괴롭히고 지배하며 파괴하는 마음속 괴물 즉 ‘트라우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다.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이라는 고래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마음 안의 괴물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그토록 지독하게 모비 딕에게 집착하는 이유, 결코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토록 치열하게 모비 딕을 향해 돌진하고 또 돌진하는 이유는 모비 딕이 바로 에이해브 선장 마음 안의 괴물이기 때문이다.

이 괴물이 마음 안에서 제멋대로 자신을 휘두르고 괴롭히며 지배하는 한 에이해브 선장은 고래잡이는 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은 에이해브 선장에게는 너무나 굴욕적인 삶이다. 때문에 에이해브 선장은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괴물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평생 이 괴물에게 지배를 당한 채 굴욕적인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삶이 다할 때까지 모비 딕을 향해 돌진하고 또 돌진하는 것, 어찌 보면 그것은 노예의 굴욕을 거부하는 에이해브 선장이 짊어져야 할 삶의 숙명이다. 승리 혹은 성공할 수 있다는 어떤 보장도 없지만 결코 주저앉거나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마음 안의 괴물, 즉 트라우마와의 싸움처럼 말이다.

에이해브 선장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바다 괴물 모비 딕처럼 우리는 모두 지난날의 상처가 만든 마음 안의 괴물, 즉 트라우마를 지닌 채 살아간다.

그 괴물은 가정 폭력과 학대의 경험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하고 성적 폭력과 학대와 희롱의 절망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하고 학교 폭력과 집단 괴롭힘의 공포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하고 이별과 사별 그리고 실연과 이혼의 슬픔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또한 재난과 사고의 고통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하고 진학과 취업 혹은 사업 실패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하고 배신과 배반의 쓰라림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우리 마음 안에 이 괴물, 즉 트라우마가 만들어지면 그것은 우리 삶의 일부 혹은 전부를 지배하면서 제멋대로 우리를 휘두르고 괴롭힌다. 더욱이 이 괴물의 악의와 잔인무도함에 짓밟혀 삶 전체가 파괴당한 경우 역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마음 안의 괴물이 자신의 힘을 제멋대로 휘두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대개 두 가지 반응과 태도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하나가 도망이라면, 다른 하나는 투쟁이다. 『모비 딕』에서도 화자 이슈메일과 선장 에이해브를 통해 자기 마음 안의 괴물에 맞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반응과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슈메일은 자기 마음 안 괴물이 제멋대로 잔인무도한 힘을 발휘하거나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발산할 때 항상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한다. 그 순간 그에게 자기 마음 안 괴물로부터의 도피처는 다름 아닌 ‘바다’이다.

“입 언저리가 일그러질 때, 이슬비 내리는 11월처럼 내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질 때, 관을 파는 가게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거나 장례 행렬을 만나 그 행렬 끝에 붙어서 따라갈 때, 특히 심기증에 짓눌린 나머지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의 모자를 보는 족족 후려쳐 날려 보내지 않으려면 대단한 자제심이 필요할 때, 그럴 때면 나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권총과 총알 대신이다. 카토는 철학적 미사여구를 뇌까리면서 칼 위에 몸을 던졌지만, 나는 조용히 배를 타러 간다.”(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비 딕』, 작가정신, 2011, p31)

반면 에이해브 선장은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 자기 마음 안 괴물과 싸운다. 마음 안 괴물이 잔인무도하게 자기를 괴롭힐수록 또한 악의에 넘쳐 제멋대로 자신을 휘두를수록 에이해브 선장의 분노와 증오심은 더욱 더 강렬하게 폭발한다.

마음 안 괴물을 향한 이 분노와 증오심이야말로 에이해브 선장이 정복할 수 없고 패배할지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 괴물을 향해 돌진하고 또 돌진하는 힘의 원천이다. 모비 딕과 생사의 격전을 치루는 최후의 순간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괴롭히고 파괴하는 이 괴물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당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비 딕』, 작가정신, 2011, p681)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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