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이 되면 활솜씨 익히고 밤이 되면 시경 주석 배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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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 되면 활솜씨 익히고 밤이 되면 시경 주석 배우네”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4.03.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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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弓詩] 조선 선비, 활쏘기를 노래하다…④奉旨就北營直宿
권신응, 북악십경 북영(北營) 군자정(君子亭), 1753, 종이, 41.7×25.7 cm, 개인소장.
권신응, 북악십경 중 <북영(北營) 군자정(君子亭)>, 1753, 종이, 41.7×25.7 cm, 개인소장.

景秋門外深臺館 경추문 밖 대관이 깊이 자리 잡은 곳
咫尺林泉畫景疑 지척 임천 고운 경치 그림인 듯 황홀하다
疊欇新紅搖石壁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암벽에서 하늘대고
敗荷殘翠戀淸池 끝물 연잎 푸른빛에 맑은 못이 사랑겹네
晝瞻
鹿工穿札 낮이 되면 웅록 보며 활솜씨 익히고
夜撿蟲魚學注詩 밤이 되면 충어 살펴 시경 주석 배우네
且與群賢成雅謔 아울러 제현들과 청아한 얘기 나누니
一旬郵罰肯嫌遲 벌을 받는 열흘 기간 지루하다 싫어하랴. (『다산시문집』 제2권)

다산(茶山) 정약용(1762(영조 38년)~1836년(헌종 2년))이 1791년(정조 15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에 춘당대 시사(試射) 이후 활을 잘 쏘지 못해 벌(罰)로 북영에 머무르던 열흘 사이 지은 시다.

앞서 살펴보았던 시 <習射 將行大射禮(습사 장행대사례)>에서 환갑 나이의 성현이 활쏘기를 배우고 연습하는 고단함을 드러낸 것과 달리 20대 정약용에게서는 오히려 패기가 넘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의지보다는 임금의 어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활쏘기를 익히지만 성현은 동료들에게 놀림감이 될까 걱정하는 시를, 정약용은 벌 받는 기간마저 지루하지도 싫지도 않다는 전혀 상반된 시를 남겼다.

경추문(景秋門)은 창덕궁의 서문이다. 대관(臺館)은 누대관각(樓臺館閣)의 준말로 일반적으로 조정관서를 지칭한다. 즉 북영(北營)을 일컫는다. 북영은 훈련도감의 본영으로 창덕궁을 경비하는 주력부대 역할을 담당했다. 지금의 원서동에 있었다. 건물은 총 235칸이었다.

임천(林泉)은 숲과 샘이라는 뜻으로 은사(隱士)가 사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웅록(態鹿)은 곰과 사슴을 그려놓은 과녁인 솔포이며 충어(蟲魚)는 벌레와 물고기로, 곧 경전에 나오는 각종 벌레와 물고기를 분석하고 따져 풀이한다는 말에서 인용했다. 시경을 풀이하는 작업을 한다는 의미다.

혐지(嫌遲)는 늦어지는 것을 싫어하다는 뜻으로 지루하다 싫어하겠는가로 풀이되는 반어법이다.

오늘날 북촌에 위치했던 북영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한 후 낮에는 활쏘기를 익히고 밤에는 시경을 풀이하는 일상을 읊었다. 이어 함께 한 동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어 열흘간의 북영 숙직을 누가 벌이라고 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시의 제목은 <奉旨就北營直宿 令習射兼對詩經條問 時 洪秀晩 穉成 宋知濂 周卿 金履喬 公世諸僚亦偕>로 다소 길다. 즉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북영으로 가 숙직했는데 그곳에서 활쏘기를 익히고 또한 시경을 조목별로 하문하신 것에 대해 대답을 하도록 했다. 이때 홍수만 치성, 송지렴 주경, 김이교 공세 등 동료가 함께 했다’는 뜻이다.

이 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약용의 또 다른 글이 있다. 바로 <북영벌사기(北營罰射記)>다. 마치 시를 해석해 놓은 정약용의 해설서라고 할 만하다.

“신해년(1791년) 9월 주상께서 춘당대에 납시어 규장각의 여러 신하들에게 웅후(熊帿:곰가죽으로 만든 과녁의 표적)를 10순(巡:1순은 화살 5개)씩 쏘라고 명하셨다. 신(臣) 용(鏞)·수만(秀晩)·명연(明淵)·반(鎜)·동만(東萬)·지렴(知濂) 등은 모두 4발[四矢]도 맞히지 못했다. 활 쏘는 법에 따르면 벌주 한 잔에 해당됐지만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에게 술을 준다면 상을 주는 것이다. 문장은 아름답게 꾸밀 줄 알면서 활을 쏠 줄을 모르는 것은 문무(文武)를 갖춘 재목이 아니니 의당 북영에 잡아놓고 하루에 20순(화살 100 개)씩 쏘아서 매순마다 한 발씩은 맞힌 뒤에야 풀어주겠다” 했다.

이에 우리들은 북영으로 갔다. 나는 이때 반열(班列)의 으뜸이었다. 처음에는 활이 망가지고 화살은 굽었으며 깍지(활을 쏠 때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끼는 기구)는 떨어져 나가고 팔찌(활을 쏠 때 왼팔 소매를 걷어 매는 띠)는 질질 끌렸으며 손가락은 부르트고 팔뚝은 부었으며 말 타는 솜씨도 서툴러서 보는 사람이 크게 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활시위를 당기는 솜씨가 점점 능란해져 1순을 쏘면 세 발을 맞히는 때가 많았다. 주상께서 그 맞히는 숫자를 보시고 하루에 10순씩만 쏘고 여가에 경의(經義)를 연구하라고 하시면서 『시경(詩經)』에 관한 문제 800여 조목을 내리시며 조목별로 답을 써서 올리라고 하셨다. 열흘쯤 지나자 사예(射藝)가 더욱 늘었고 마침내 풀려나게 됐다.

나는 삼가 생각하건대 옛날은 육예(六藝)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유자(儒者)라고 이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연회 때는 반드시 활쏘기를 했으니 삼련(參連)과 백시(白矢) 같은 것도 그들이 대부분 익혔던 것이다. 후세에는 문무(文武)의 도가 나뉘어졌으며 우리나라 풍속 또한 문(文)을 귀히 여기고 무(武)를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지필(紙筆)을 익혀 먹을 다루고 편지글이나 쓰는 말기(末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평생동안 활을 잡아 보지도 못하고 늙는 자가 있다.

지금 우리 몇 사람들은 다행히 성인(聖人)의 세상에 났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인데 성인의 문하(門下)에서 노닐며 궁시(弓矢)에 종사하게 되어 거칠게나마 활의 좌우와 당기고 놓음을 구별할 줄 알게 됐으니 이른바 천고(千古)에 한 번 만나는 행운이 아닌가.

그런데 그 활쏘기 연습은 열흘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360일 가운데 36분의 1을 할애해 스스로 활쏘는 기예(技藝)를 익히지 못하고 임금의 가르침을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힘써서 했으니 이것은 또한 우리의 죄인 것이다.“ (『다산시문집』 제14권)

당시 정약용 일행이 활쏘기를 익혔던 북영에는 괘궁정((掛弓亭)과 군자정(君子亭) 두 개의 활터가 있었다. 이들 활터는 창덕궁 안 신선원전 서쪽 담장 넘어 중앙고등학교 사이를 흐르는 북영천(北營川)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괘궁정은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지만 군자정은 흔적조차 없다.

창덕궁 신선원전 서쪽 담장의 괘궁정 모습.
창덕궁 신선원전 서쪽 담장의 괘궁정 모습. [사진=한정곤]

정약용의 시문에서는 활쏘기를 익힌 활터가 군자정인지 아니면 괘궁정인지 언급돼 있지 않다. 다만 정조가 군자정에서 친사(親射)를 했다는 기록과 정약용의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풍광 등을 통해 괘궁정보다는 군자정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군자정은 영조 때 붕당을 반대하는 탕평론자였던 소론당의 좌의정 학암(鶴巖) 조문명(趙文命·1680~1732년)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군자정의 모습은 조선 후기 화가 권신응(1728~1786년)이 그린 <북영 군자정(北營 君子亭)>으로 전해진다. 비록 과녁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사정(射亭)과 함께 주변 산세와 전각들이 묘사돼 있다.

그림에서 군자정은 북영천 위에 정자를 세웠다. 왼쪽 위에 백악(白岳)·중간 절벽에는 괘궁암(掛弓岩), 오른쪽 위 숲속에는 대보단(大報壇)·중간에는 영각(營閣)이 그려져 있다. 정자에는 세 사람이 앉아있고 둑길 위에는 두 사람이 군자정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군자정은 ‘연꽃 구경하는 정자’다. 즉 군자정은 사정이면서 연꽃 피는 계절이면 연꽃 구경에 제격인 정자였던 것이다.

정약용의 시 ”지척 임천 고운 경치 그림인 듯 황홀하다 /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암벽에서 하늘대고 / 끝물 연잎 푸른빛에 맑은 못이 사랑겹네“라는 묘사와 일치한다.

정조가 군자정에서 친사했다는 기록도 『일성록』에 전해온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년) 6월20일 “연못의 연꽃이 활짝 피고 날이 갠 뒤 더위가 물러가니 심사를 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북영의 몽답정(夢踏亭)에 가서 경숙(經宿)하면서 울적한 심사를 풀 것”이라며 창덕궁을 나섰다.

북영 후문으로 나가 제동(濟洞) 뒷고개를 넘어 길을 따라가며 회동(灰洞) 뒷고개에 이르렀다가 북창(北倉)의 여러 곳을 돌아다닌 후 해질 무렵 북영으로 돌아온 정조는 군자정에서 활쏘기를 했다.

이날 정조는 “유엽전으로 제1순에는 4발을 맞혀 6분(分)을 얻었고 제2순에는 2발을 맞혀 3분을 얻었으며 제3순에는 4발을 맞혀 5분을 얻었다”고 『일성록』에 기록했다.

한편 정약용과 함께 북영에서 숙직하며 활쏘기를 익혔던 동료들로 홍수만(洪秀晩), 송지렴(宋知濂), 김이교(金履喬)가 등장한다.

홍수만(1759(영조 35년)~미상)은 1789년(정조 13년) 식년시 진사 3등 6위로 입격했고 다음 해인 1790년(정조 14년) 증광시 병과 30위로 문과 급제했다. 자는 치성(穉成)이다. 1809년(순조 9년) 사간원대사간, 1813년 동래부사, 1819년 성균관대사성, 1820년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부산시 동래구 명륜동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홍수만 흥학비(洪秀晩興學碑)’가 있다.

송지렴(1764년(영조 40년)∼미상)은 1790년(정조 14년)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고 1796년 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자는 주경(周卿)이다.

1802년(순조 2년) 홍문록에 선발됐고 이후 수찬(修撰) 등을 역임했다. 1804년에는 어사(御史)에 적합한 인물로 선발되기도 했고 1805년 정순왕후 김씨의 혼전(魂殿)인 효안전(孝安殿)에서 이루어진 주다례(晝茶禮)에 참여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됐다. 이후 광주목사·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김이교(1764년(영조 40년)~1832년(순조 32년))는 1789년(정조 1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수찬(修撰)·초계문신(抄啓文臣)·북평사(北評事)를 거쳐 1800년 겸문학(兼文學)이 됐다. 같은 해 6월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 김씨(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고 시파를 탄압했다. 이때 시파였던 그는 벽파에 의해 함경북도 명천에 유배당했다.

1811년 2월 통신사의 사명을 띠고 출발해 5월22일 부사(副使) 이면구(李勉求)와 함께 대마도부중(對馬島府中)의 객관(客館)에서 동무상사(東武上使) 미나모토와 부사 후지야스에게 국서전명(國書傳命)을 거행하고 공사예단(公私禮單: 공적 혹은 사적으로 주는 외교상의 예물 명단)을 전달했다. 같은 해 7월3일 대마도를 떠나 부산에 도착했고 7월26일 왕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이 통신사가 조선의 마지막 통신사였다. 이듬해에도 대마도에 건너가서 국서를 전달했다.

그 뒤 대사성·대사헌·도승지·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이조판서·평안도관찰사·병조판서·형조판서·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831년 우의정에 올랐는데 이때 영의정과 좌의정이 모두 공석으로 한때 국정을 도맡아 수행했다. 순조 묘정에 배향됐으며 저서로 『죽리집(竹里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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