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평탄하고 몸 곧음이 활 잡는 바른 자세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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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평탄하고 몸 곧음이 활 잡는 바른 자세일세”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4.05.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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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弓詩] 조선 선비, 활쏘기를 노래하다…⑧拂雲亭 觀德
규장각도(奎章閣圖) 부분, 1776년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규장각도(奎章閣圖)> 부분, 1776년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分曹秩秩降登時 질서 있게 무리 지어 오르내릴 때
畫鼓聲傳颺錦旗 북소리 울려 퍼지고 비단 깃발 나부끼네
蒼檜雲晴遙辨鵠 푸른 전나무에 구름 개니 표적의 빛깔 뚜렷하고
金莎塵宿正翻麋 금잔디 깨끗하니 과녁도 번뜩이네
明之已審虞臣戒 총명은 이미 순임금 신하에 경계한 것 살폈고
爭也須思魯聖儀 다투면서 생각할 건 공자가 말씀하신 위의일세
昭代修文非貫革 좋은 시대 문덕을 닦아 과녁 뚫는 것 숭상치 않으니
心平體直把弓宜 마음 평탄하고 몸 곧음이 활 잡는 바른 자세일세. (『청장관전서』 제20권)

정조 3년(1779년) 7월13일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었던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등에게 ‘규장각(奎章閣) 팔경시(八景詩)’를 지어 올리라 명했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이들의 시를 평가하게 한 정조는 이덕무의 시를 최고로 꼽은 후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이덕무에게는 『명의록(明義錄)』 1질을 하사했다. 모두 5책으로 언해가 4책이다.

이덕무의 시는 모두 칠언(七言)의 근체시(近體詩)로 8편이다. 위에 소개한 시는 8편 가운데 4번째로 <불운정(拂雲亭)에서의 활쏘기[觀德]>라는 제목이 붙었다.

불운정은 창덕궁 후원 규장각(현 주합루) 동북쪽 언덕에 있던 활터다. 정종 원년(1398년)에 건립됐지만 당시엔 이름이 없었고 훗날 성종이 대제학 서거정에게 명해 불운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순조 재위 당시 그려진 <동궐도>에는 정자가 보이지 않아 이미 철거됐음을 알 수 있다.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의 시문집 『번암집』 34권에는 1777년(정조 1년) 4월 중순 정조가 불운정에 거동해 신하들과 활쏘기를 했던 일을 기록한 ‘불운정 활쏘기에 대한 기문’이 수록돼 있어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기문에는 “규장각(奎章閣) 동북쪽 작은 언덕에 대나무로 얽은 정자가 있는데 불운정이라고 한다”고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 “과녁은 흰 바탕에 아홉 가지 동물을 그렸다”면서 “곰이 그 중간에 그려져 있고 곰의 상하와 좌우에 호랑이, 수리, 기러기, 토끼, 꿩, 사슴, 원숭이, 물고기가 각각 차례로 자리 구획돼 있다”고 과녁의 형상을 묘사한다.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들에게 자주 활쏘기를 시켰고 연사례(燕射禮)도 개최했다. 영조가 성균관에서 개최했던 대사례가 활쏘기를 통해 완력과 덕행을 살펴 인재를 선발하는 행사라면 연사례는 궁중에서 왕이 사사로이 시행했던 신하들과의 활쏘기 대회다.

이덕무는 시에서 북소리 울려 퍼지는 불운정을 오르내리는 궁사들의 모습을 먼저 그렸다. 이어 맑은 하늘에 비단 깃발이 나부끼고 푸른 전나무와 금잔디가 펼쳐진 활터의 풍광을 묘사했다. 그리고 활쏘기로 덕행을 살펴 나쁜 사람을 가려낸다는 순임금의 말과 군자는 오직 활쏘기로 다툰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나 활쏘기는 관중이 제일이 아니라며 마음 평탄하고 곧은 몸가짐을 강조했다.

시에서 ‘총명은 이미 순임금 신하에 경계한 것 살폈고’는 『서경(書經)』 「우서(虞書)」 <익직(益稷)>에 나오는 말로 순(舜)임금이 말하기를 “완악하고 참소해 나라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과녁을 베풀고 활쏘기를 하여 밝혀낸다”고 했는데 그 주에 “이는 활쏘기로서 덕행(德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나쁜 사람을 가려낸다는 말이다”고 했다. 순의 신하인 우(禹)는 이 말을 듣고 경계해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임금께서 덕으로 온 천하를 밝히면 만방 백성들이 모두 임금의 신하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고 했다.

‘다투면서 생각할 건 공자가 말씀하신 위의일세’는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군자(君子)가 다투는 일이 없지만 활쏘기에서는 재주를 다툰다. 읍(揖)하고 사양하면서 오르내리고 맞추지 못한 사람은 아래로 내려가서 벌주를 마시니 그 다투는 것이 군자다”고 했다는 구절을 가리킨다.

‘좋은 시대 문덕을 닦아 과녁 뚫는 것 숭상치 않으니’ 역시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활쏘기에 과녁 뚫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 것은 힘이 같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이 옛날의 도다”고 했는데, 그 주에 “활쏘기란 덕을 보는 것이므로 맞추는 것을 중시하고 과녁 뚫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의 힘이 강약이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

이날 이덕무가 쓴 ‘규장각 팔경시’의 팔경은 불운정을 비롯해 봉모당(奉謨堂)의 은하수, 서향각(書香閣)의 연꽃과 달, 규장각(奎章閣)에서의 시사(試士), 개유와(皆有窩)의 매화와 눈, 농훈각(弄薰閣)의 단풍과 국화, 희우정(喜雨亭)의 봄빛, 관풍각(觀豐閣)의 추사(秋事) 등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덕무는 북학파 실학자로 영·정조 시대 활약한 최고의 문장가이자 독서가다. 가난한 서얼 출신으로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을 갈고닦았다. 당대 최고 지성인 박지원·홍대용·박제가·유득공 등과 교류하면서 ‘위대한 백년’으로 불리는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주도했다.

1792년 개성적인 문체 유행을 금지하는 문체반정에 휘말렸음에도 사후 정조의 명에 의해 국가적 차원에서 내탕금으로 유고집 『아정유고(雅亭遺稿)』가 간행될 만큼 인정받은 대문장가였다.

특히 이덕무는 정조의 명을 받아 박제가와 처남인 조선 최고의 칼잡이 백동수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다. 이덕무의 무예관은 북학(北學)의 고증학이 밑거름이 되었다. 그 중 『무예도보통지』는 고증학의 한 분야인 명물도수(名物度數)를 기준으로 하는 실용적인 관점을 가지고 편찬됐다.

아이 같은 천진하고 순수한 감정을 중시한 독창적인 글쓰기 철학을 바탕으로 조선의 생생한 진경을 담은 수많은 시와 산문을 남겨 멀리 중국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내 청춘을 이끈 힘은 이덕무의 글이었다”고 했을 만큼 그의 글은 시대를 초월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철학적 바탕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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