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의 『징비록』과 이순신의 『난중일기』…공통점과 차이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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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의 『징비록』과 이순신의 『난중일기』…공통점과 차이점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04 1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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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읽기>④ 관료와 지식계층에서 쏟아진 임진왜란 기록물
▲ 임진왜란 중 조선군이 왜군에게 빼앗긴 평양성을 탈환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임진왜란은 조선이 개국한 이후 치른 최대의 전란이었기 때문에 당시 조정 관료와 양반사대부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나게 컸다.

더욱이 조선보다 미개하다고 멸시하던 일본으로부터 당한 침략이어서 그 정신적 충격은 더욱 깊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뜻있는 조정 관료와 지식계층에서 앞 다투어 전쟁의 원인과 과정을 살펴보고 극복 대책을 논하는 기록물을 쏟아냈다.

국가의 공식 기록물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는 별도로 『임진기록(壬辰記錄)』, 『정만록(征蠻錄)』, 『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용사잡록(龍蛇雜錄)』, 『쇄미록(瑣尾錄)』등 문신(文臣)과 재야사림(在野士林)들의 기록물은 다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처럼 수많은 문신과 재야사림들의 기록물을 제치고 임진왜란에 관한 가장 입체적이고 정확한 정보와 자료를 제공해 주는 책으로 역사학자들은 단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을 꼽는다.

『난중일기』가 전투 현장의 한복판에서 이순신 장군이 마치 작전 일지를 기록하듯 하루하루의 전쟁 상황과 자신의 심정을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담아 남긴 일기라면,『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국제정세로부터 전쟁의 실상 그리고 전쟁이 끝난 이후의 상황까지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구성하고 분석해놓은 일종의 보고서 같은 책이다.

이순신 장군이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오직 일본의 수군을 물리치고 남쪽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분전(奮戰)한 반면 유성룡은 일본과의 전쟁 상황뿐만 아니라 당파로 얽힌 국내 정치와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이처럼 각자 다른 성격의 기록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가장 충실한 기록물을 남긴 것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삼은 영남사림의 강좌학파(江左學派)를 대표하는 대유학자이다. 이 때문에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分黨)한 이후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항상 당쟁의 한복판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정과 군사를 총지휘하는 영의정 겸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맡아 당파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명나라의 간섭과 압력을 무마하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유성룡의 숱한 노력에도 당파 간 정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결국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 북인(北人)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하고 만다. 이때 고향으로 돌아간 유성룡은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했다.

그 후 복관(復官)되어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이미 정치에 뜻을 꺾은 유성룡은 일체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66세가 되는 1607년에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은 민본주의와 왕도정치를 지상과제로 삼은 유성룡과 같은 사림 출신들에게는 평생의 치욕으로 남을 만한 사건이었다. 유성룡은 그 치욕과 수모를 도저히 씻을 수 없다는 뜻에서 임진왜란 7년 전쟁에 대한 기록물의 제목을 ‘징비(懲毖)’라고 했다. ‘징비(懲毖)’는 『시경(詩經)』 「송(頌)」편에 나오는 ‘소비(小毖)’의 첫 구절이다.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내가 삼가고 조심하는 것은 후환을 경계함이다.”

즉 유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자신이 겪었던 임진왜란을 교훈삼아 미래에 닥쳐올지도 모를 또 다른 전란을 경계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성룡의 이 같은 노력 역시 훗날 인조반정을 통해 권력을 잡은 서인(西人)들에 의해 폄하되고 배척당했다.

서인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잡은 후 개수(改修)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유성룡은) 일찍이 임진년의 사건을 추가로 기록해 이름 하기를 『징비록』이라고 했는데, 세상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식견이 있는 자들은 자신만을 내세우고 다른 사람의 공적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징비록』을 업신여기고 무시했다.” 『선조수정실록』 40년(1607년) 5월1일, ‘풍원부원군 유성룡의 졸기’

떠올리기 싫은 기억까지 되살려 후대의 자손들이 경계와 교훈을 삼도록 피눈물을 쏟으며 기록한 유성룡의 진심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당파와 당쟁의 골은 깊었다.

그리고 유성룡의 간곡한 훈계에도 임진왜란을 불러온 근본적인 원인을 치유하지 못한 조선은 또다시 북쪽 청나라의 침략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고 만다.

인조가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한 1637년은 임진왜란이 막을 내린 지 40여년, 유성룡이 세상을 떠난 지 30여년이 되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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