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⑥ 조선의 서예와 차 문화의 선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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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⑥ 조선의 서예와 차 문화의 선도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18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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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㉑
▲ 소치 허련이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

[한정주=역사평론가] 김정희가 학문에 있어서 고증학과 금석학과 역사학의 독보적인 권위자였다면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조선의 서예(書藝)와 차(茶) 문화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사대부와 지식인들 사이에 큰 유행과 융성을 불러일으킨 대가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김정희의 삶에서 서예나 차와 관련한 호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겠다.

위대한 제국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김정희가 창안한 ‘추사체(秋史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환재(瓛齋) 박규수는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만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창적인 서체를 얻을 수 있었다고 증언해주고 있다.

“완옹(阮翁)의 서체(書體)는 어렸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에 걸쳐 변화했다. 어렸을 때에는 오로지 명나라의 서예가 동현재(董玄宰: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중년에는 담계(覃溪) 옹방강을 따라 노닐면서 온힘을 쏟아 그 서체를 본받았다. 그래서 서체가 농후(濃厚)하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소동파와 미불(米芾)을 따라 당나라 때의 서예가 이북해(李北海: 이옹)로 바뀌어서 더욱 왕성하고 굳세졌고, 마침내 다시 구양순의 진수(眞髓)를 얻게 되었다.

만년(晩年)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이후부터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구속받거나 남을 따라다니는 경향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러 대가(大家)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하나의 서법을 이루었는데 신기(神氣)가 오는 듯 해 마치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것과 같았다. 단지 문장가들만이 그렇게 여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간혹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서체가 거리낌이 없고 제멋대로 썼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신중함과 엄격함의 극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일찍이 후생(後生)의 소년들에게 완옹의 서체를 가볍다고 여겨 쉽게 배우려고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환재집(瓛齋集)』, ‘유요선이 소장하고 있는 추사의 유묵(遺墨)에 쓰다(題兪堯仙所藏秋史遺墨)’

박규수의 증언대로 김정희는 평생에 걸쳐 뼈를 깎는 듯한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인 다음에야 추사체를 자득할 수 있었다.

김정희는 절친한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평생 서예에 쏟아 붓은 공력을 이렇게까지 표현했다. “칠십 년을 살아오면서 열 개의 벼루를 갈아 구멍을 내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닿게 했다(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라고.

특히 김정희는 서예가는 묵(墨)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좋은 벼루를 얻은 다음에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벼루와 종이와 붓의 관계를 논할 때 역시 벼루가 첫 번째이고, 그 다음은 종이이며, 또 그 다음이 붓이라고 했다.

“서예가들은 묵(墨)을 제일로 삼는다. 대개 글씨를 쓸 때 붓을 부리는 것은 즉 붓으로 하여금 묵을 따라가게 하는데 불과할 뿐이다. 종이와 벼루는 모두 묵을 도와서 서로 쓰임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종이가 아니면 묵을 수용할 수 없고 벼루가 아니면 묵을 발산시킬 수 없다.

묵이 발산된 것은 묵의 화려함이 날아오르는 채색이니 문장의 묵을 잘 거두는데 그치지 않는다. 묵을 거두는데 능숙하나 묵을 발산시키는데 능숙하지 못한 것은 또한 훌륭한 벼루가 아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벼루를 얻은 연후에야 글씨를 쓸 수 있다. 벼루가 아니면 묵을 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묵에 대한 종이의 관계 역시 벼루와 서로 비슷하다. 모름지기 반드시 좋은 종이여야 비로소 묵이 따라 내려갈 수 있다. 이 때문에 묵과 징심당지(澄心堂紙)ㆍ옥판지(玉版紙)와 동전(桐箋)ㆍ선전(宣牋) 등의 종이를 보배로 삼는다.

붓은 또한 그 다음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로지 필치(筆致)에만 힘을 쏟을 뿐 묵법(墨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시험 삼아 종이 위의 글자를 보면, 오로지 묵만 있을 뿐인데, 이러한 일은 백성들이 날마다 쓰면서도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완당전집』, ‘묵법변(墨法辨)’

이러한 까닭에 김정희는 평생에 갖고 싶은 세 가지를 말하면서, 그 첫 번째로 중국의 단계 지방에서 나는 돌로 만든 단연(端研)이라는 벼루를 꼽았을 만큼 벼루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컸다.

김정희는 이러한 자신의 벼루 벽(癖)을 호를 통해서도 고스란히 드러냈다. ‘세 개의 벼루’를 뜻하는 삼연재(三研齋)나 삼연노인(三硯老人), ‘벼루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그림’에서 의미를 취한 연도암(研圖庵), ‘임금이 하사한 벼루를 기린다’는 뜻의 사연당(賜研堂), ‘벼루를 갈고 다듬는다’는 뜻의 마연도인(摩研道人), ‘오래된 벼루’에 빗대어 지은 호인 ‘고연재(古연(石+目)齋)’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철종실록』에 실려 있는 ‘김정희의 졸기(卒記)’에서 밝혔듯이 김정희는 초서(草書)·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隸書)에 모두 뛰어났지만 그 가운데 전서(篆書)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갖고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 자신의 서예 실력을 길렀다고 한다.

그래서 ‘청구(靑丘: 조선)에서 전서를 쓰며 지내는 산 사람’이라는 뜻의 청전산인(靑篆山人), ‘전서를 탐구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전암(篆盦) 등을 통해 전서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서예 문화와 함께 김정희가 유행시킨 또 다른 문화는 ‘차(茶)’였다. 앞서 ‘여유당(與猶堂) 정약용’편에서 필자는 조선에 들어와 사라지다시피 한 차 문화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다산(茶山) 정약용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정약용의 뒤를 이어 19세기 조선에서 차 문화를 본격적으로 발전·융성시킨 사람은 바로 김정희였다.

이에 대해 정민 교수는 “조선 후기 차 문화사에서 다산이 중흥조였다면 초의는 이를 든든히 뒷받침해 새 길을 연 전다박사였다. 하지만 추사가 없었다면 초의의 존재는 그렇게까지 빛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정민 저,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김영사, 2011. p377)라고 밝혔다.

김정희가 ‘처음 차의 참 맛을 느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태화쌍비지관으로 완원을 찾아갔던 1810년(나이 25세) 1월 무렵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완원은 조선에서 찾아 온 젊은 천재에게 당대 최고의 명차(名茶)였던 ‘용단승설(龍丹勝雪)’을 달여 대접했다. 김정희는 이전 조선에서 간혹 차를 마셔보았지만 이토록 훌륭한 차는 아니었다.

당시 맛본 용달승설이 얼마나 김정희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훗날 그가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다품(茶品)은 과연 승설(勝雪)의 남은 향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 향기가 더합니다. 일찍이 쌍비관(雙碑館)에서 이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돌아온 후 40년 동안 다시는 이러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완당전집』, ‘권이재(돈인)에게 보내다(與權彝齋(敦仁)) 열일곱 번째(十七)’

이 때문에 차와 관련한 김정희의 호 역시 용단승설에서 기인한 것이 많다. 승설도인(勝雪道人), 승설학인(勝雪學人), 승설노인(勝雪老人) 등이 그렇다.

완원과의 만남에서 차의 참 맛을 체험한 김정희는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 본격적으로 차를 즐겨 마셨던 듯하다. 그러나 차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 조선에서 차를 구하는 것은 어려웠고 청나라에 간 사신 편에 들어오는 차는 그다지 품질이 좋은 차도 아니었고 수량도 많지 않았다.

차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하던 김정희는 뜻밖에 차의 명인(名人) 초의선사를 만나 다시 차와 마주할 수 있었다. 김정희와 초의선사는 차를 매개로 깊은 교류를 맺었다.

▲ 초의선사 초상.

현재 『완당전집』에 남아 전해오는 김정희의 편지 글을 살펴보면, 젊었을 적부터 절친한 벗이었던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35통 보다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가 세 통이나 더 많다.

이외에도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는 12통이 더 남아 있어 모두 50여 통에 이른다. 그런데 이들 50여 통의 편지 중 무려 15통 정도가 차와 관련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차로 맺어진 초의선사와의 인연은 다시 다산 정약용과의 인연으로 확장되었다.

김정희의 나이 33세 때인 1818년 8월 정약용은 기나긴 강진 유배 생활을 끝내고 고향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약용의 고향 마을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운길산의 수종사에 가보면 정약용과 초의선사와 김정희가 함께 모여 이곳의 샘물로 차를 달여 마셨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와 함께 그것을 기리기 위해 다실(茶室)이 차려져 운영되고 있다.

특히 김정희는 초의선사가 만든 차를 매우 즐겨 마셨던 듯하다. 평상시에는 물론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참혹한 순간과 죽음을 맞을 때를 준비한 말년의 과천 시절에도 끊임없이 서신을 통해 초의선사에게 이른바 ‘걸명(乞茗)’, 곧 차를 보내 달라는 청을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보내준 다병(茶餠 : 떡차)는 이미 다 먹고 떨어졌습니다. 물리지도 않고 요구만 하는 사람이 많이 보내주실 것을 어찌 바라겠습니까. 모두 뒤로 미루고 이만 줄입니다.” 『완당전집』, ‘초의에게 보내다(與草衣) 기이십육(其二十六)’

“베풀어주신 차는 병든 위(胃)를 쾌히 낫게 해주니 감사한 마음이 뼈에 사무치도록 간절합니다. 하물며 이와 같이 기력(氣力)이 약해져 몸이 가라앉는 속에서이겠습니까!” 『완당전집』, ‘초의에게 보내다(與草衣) 기이십구(其二十九)’

“나는 선사(禪師)를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선사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오로지 차(茶)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내지도 없애지도 못하고 부수어 버릴 수도 없어서 다시 차를 보내달라고 재촉합니다.” 『완당전집』, ‘초의에게 보내다(與草衣) 기삼십사(其三十四)’

“다만 이가 욱신거리도록 참으로 답답하지만 홀로 좋은 차를 마십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같지 못한데, 이는 감실(龕室) 속 부처 역시 자못 영험(靈驗)하여 계율을 베푼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차(茶)를 마시지 못해 병을 얻었는데, 지금 보내주신 차(茶)를 보니 병이 나아버렸습니다. 웃을 만한 일입니다.” 『완당전집』, ‘초의에게 보내다(與草衣) 기삼십오(其三十五)’

“가을이 지난 이후에도 계속 부쳐 주길 바라지만, 이것은 물리지도 않는 욕심이 아니겠습니까. 향훈 스님이 만든 차도 인편(人便)에 따라 즉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때마침 그곳에 가는 인편으로 말미암아 간략하게 적을 뿐 장황하게 쓰지 못합니다.” 『완당전집』, ‘초의에게 보내다(與草衣) 기삼십칠(其三十七)’

물론 김정희가 답례 없이 ‘걸명(乞茗)’과 한 것은 아니다. 김정희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글씨를 써서 답례로 초의선사에게 보내주곤 했는데 ‘명선(茗禪)’, 즉 ‘차(茗)가 곧 선(禪)’이라는 명작을 써준 것이 그 대표적 예다.

그렇다면 용단승설과 관련된 호 이외에 차와 관계되는 김정희의 호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먼저 ‘차의 갓 돋아난 어린 싹을 따서 만든 맛이 쓴 차’를 뜻하는 고차(苦茶)에 빗대어 고다암(苦茶庵), 고다노인(苦茶老人)이라는 호를 지어 썼고, 다시 ‘차를 달이는 화로’에 비유해 자신의 서실을 가리켜 다로경권지실(茶爐經卷之室)과 경향다로실(經香茶爐室)이라 부르고 또한 호로 사용하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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