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암(樊巖) 채제공…정치적 재기 기다리며 개혁정치 설계도 그렸던 은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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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樊巖) 채제공…정치적 재기 기다리며 개혁정치 설계도 그렸던 은둔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20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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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72)
▲ 번암 채제공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백규(伯規). 성호 이익에게 큰 영향을 입은 오광운의 제자로 평생 성호학파의 학풍을 좇아 학문을 익히고 정치에 임했다.

영조 때 죽음을 무릅쓰고 사도세자를 변호해 정조의 신임을 얻었고, 정조 즉위 이후 남인의 영수로 문치와 개혁정치를 주도하다시피 했다.

1788년(정조 12년) 나이 69세 때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남인 출신으로 80여년 만에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2년 후에는 좌의정으로 승진해 3년 간 혼자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정 운영을 책임지다시피 했다.

나이 72세가 되는 1791년(정조 15년)에는 신해통공을 성사시켰고, 다시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에 올라 수원 화성 축성을 총괄 지휘했다.

정조 시대 최고의 지위를 누리며 개혁과 이용후생을 향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마음껏 펼쳤지만 나이 61세인 1780년(정조 4년) 권신(權臣) 홍국영이 실각할 때 그와 친분이 두텁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거듭 주장해 선왕(영조)의 유지를 부정한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무려 8년 동안 서울 근교 명덕산(明德山)에 은둔해 살았다.

명덕산은 동대문 바깥 10리쯤에 있었다고 하지만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대개 지금의 서울 강북구 번동(樊洞) ‘북서울 꿈의 숲’ 남쪽에 자리하고 있던 야산으로 추정할 뿐이다.

‘번암(樊巖)’이라는 채제공의 호가 ‘번계(樊溪)’라고 불렀던 개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에 당시 그가 은둔해 살았던 명덕산은 번동 일대에 위치한 어느 산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채제공의 ‘번암(樊巖)’이라는 호는 야인(野人)으로 지내면서도 정치적으로 재기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훗날 시행할 ‘개혁정치의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던 은둔지 명덕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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