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맺지 못한 꽃과 근원이 없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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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맺지 못한 꽃과 근원이 없는 물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6.02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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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103)
 

[한정주=역사평론가] 널리 알면서도 편찬하거나 저술하지 못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이나 다름없다. 이미 떨어져버린 꽃이 아니겠는가.

편찬하거나 저술하면서도 널리 알지 못하는 것은 근원이 없는 샘물이나 다름없다. 이미 말라버린 샘물이 아니겠는가.(재번역)

能淹博 而不能纂著 猶無宲之花 不已落乎 能纂著 而不能淹博 猶無源之泉 不已涸乎. 『이목구심서 2』

세상의 모든 것을 두루 알면서도 저술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스스로 깨달아 터득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1만 권의 책을 읽더라도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을 배우고 익히는데 만족한다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스스로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깨우치려고 한다면 구태여 책을 읽지 않더라도 책을 읽은 사람보다 더 많이 알게 된다.

세상의 이치가 어찌 책 속에만 있겠는가? “사마천의 문장은 책 속에 있지 않았다”고 한 옛 사람의 말을 곱씹어 볼 일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있으면 저술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술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가슴속에 간직한 말과 글이 흘러넘치는데 어떻게 저술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술하면서 두루 알아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스스로 깨달아 터득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이치에 통달할 수 있겠는가?

아는 것이란 다시 아는 것 밖의 모르는 것, 그리고 다시 아는 것의 끝없는 순환이다. 깨우침과 깨달음 역시 마찬가지다.

지식은 연쇄반응을 일으킬 때 가장 좋다. 하나의 지식을 알게 되면 다른 지식에 대한 의문이 일어난다. 그 의문을 풀어가다 보면 또 다른 지식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다.

문학을 알면 역사가 궁금해지고, 역사를 알면 철학이 궁금해지고, 철학을 알면 과학이 궁금해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학문과 저술이 지극한 경지에 오른 사람은 반드시 문학가이자 역사가였고 철학자이자 과학자였으며 또한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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