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무엇을 지향했던 18세기 지식인의 상징이자 표상 ‘벽(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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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무엇을 지향했던 18세기 지식인의 상징이자 표상 ‘벽(癖)’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7.21 0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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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② 기묘(奇妙)와 기궤(奇詭)의 미학⑧
▲ 단원 김홍도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개인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또한 이가환의 독특한 문기(文氣)와 기발한 문풍(文風)은-앞서 소개했던 박제가와 홍현주처럼-‘벽(癖)’을 예찬한 ‘심중빈의 일노서에 부치다(贈沈仲賓日魯序)’라는 글에 더욱 잘 드러나 있다.

국화 벽(癖)에 걸린 심중빈이라는 이가 자신의 벽(癖)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탄식하자 이가환은 문장을 짓는 방법도 벽(癖)에 있고, 진리를 구하는 방법도 벽(癖)에 있다면서 오히려 자신이 그의 집을 찾아가 남아 있는 벽(癖)을 구걸해야겠다고까지 말한다.

‘벽(癖)’이라는 한 글자만큼 다른 사람과 다른 나만의 개성적인 자아와 취향을 담은 글쓰기를 추구했던 이가환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글자도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벽(癖)’은 남과 다른 독특한 ‘무엇’을 지향했던 18세기 지식인의 상징이자 표상이라고 하겠다.

“심중빈 군은 성품이 담박하고 특별한 기호가 없는 사람이다. 올 여름에 내가 국화를 심어볼까 하였더니 중빈 군에게 국화를 부탁해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여러 번을 권하고서야 한번 물어보았더니 중빈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국화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몇 뿌리를 주었을 때에도 그저 심어놓기나 하였을 뿐 사랑하는 마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행히도 국화가 살아서 어느새 줄기와 잎사귀가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는 드디어 끝까지 키워볼 욕심이 생겨서 날마다 물을 주었지요. 이로부터 하루라도 물을 주지 않으면 우쭐우쭐 자라던 꽃이 시드는 것처럼 보였고, 물을 주면 성난 듯이 자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 기르게 되고, 기르면 기를수록 더욱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침내 국화에 대한 벽(癖)이 생겨 제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대비가 허술한 담을 넘어온 도둑에게 모조리 털린 뒤에는 더더욱 분발하여 한결 좋은 품종을 구했고, 남들도 앞 다투어 제게 국화를 주었습니다. 이제는 국화의 온갖 품종을 대충 갖추었고, 재배하고 보호하는 법을 더욱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국화를 잘 아는 사람으로 이름이 떠들썩하게 나서 공에게까지 알려진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자신이 지은 국화시와 소서(小序) 약간 편을 내어놓는데 도움이 될 말을 청하는 의중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그에게 일렀다.

‘그대는 도움이 될 말을 청하는가? 그것이라면 그대가 말한 국화를 심은 내력에 빠짐없이 들어 있네. 문장을 짓는 방법도 여기에 있고, 도를 구하는 방법도 여기에 있네. 그러니 또 내게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내 곧 불원간 자네 집을 찾아가 자네가 남긴 것을 구걸하겠네.” 이가환, ‘심중빈의 일노서(日魯序)에 부치다(贈沈仲賓日魯序)’

성인(聖人)의 삶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하며 평생 군자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정도(正道)로 여겼던 성리학적 세계와 사고 속에서 개성적 자아는 용납할 수 없는 일탈이자 제거해야 할 해악이다.

그런데 오히려 ‘벽(癖)’을 예찬하는 이가환의 글은-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시각으로 되돌아가 살펴볼 때-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첨신(尖新)’, 즉 시대의 맹점을 정확히 찌르는 날카로움과 새로운 발상의 수준에 올라서 있었다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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