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주의 경제학파의 개척자 유수원…⑤“빈곤의 원인은 인구가 아닌 비효율적 제도와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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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주의 경제학파의 개척자 유수원…⑤“빈곤의 원인은 인구가 아닌 비효율적 제도와 시스템”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8.10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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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맬서스 『인구론』 맹점 60년 앞서 비판한 재야 경제학자

[조선의 경제학자들] 맬서스 『인구론』 맹점 60년 앞서 비판한 재야 경제학자

[한정주=역사평론가] 유수원은 18세기에 활동한 그 어떤 경제학자들보다 훨씬 더 독창적인 경제사상을 주창한 인물이었다.

『우서』의 맨 앞부분인 ‘사민총론(四民總論)’에 나오는 ‘인구와 빈곤의 문제’를 살펴보면 유수원이 얼마나 독창적인 경제사상의 소유자였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영국의 고전학파 경제학자인 맬서스가 1798년 『인구론』을 출간한 이후 근대 경제학은 오래도록 ‘인구 증가가 빈곤의 원인’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다.

맬서스는 이 책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날 뿐이어서 과잉 인구로 인한 식량 부족은 피할 수 없고, 이에 따라 빈곤과 죄악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보았다. 잘 알다시피 맬서스 인구론의 경제 원리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우리나라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런데 유수원은 『우서』에서 맬서스의 『인구론』을 완전히 뒤집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서』가 『인구론』보다 60여년 앞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유수원은 현대의 경제학자들이 20세기 말경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깨달은 『인구론』의 맹점과 잘못을 이미 200여년 전에 간파하고 있었던 셈이다.

유수원이 살던 당시 대다수 지식인들은 “백성이 점차 가난하고 궁핍해진 이유는 인구가 크게 불어났기 때문이며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 날로 살림살이가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맬서스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한 셈이다.

이에 대한 유수원의 반론은 이렇다.

“세상에는 그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말은 참으로 근거가 없는 논리다. 우주가 존재하면서부터 사람이 존재했고, 사람이 있으면서부터 의식(衣食)이 존재했다. 이것이 천지자연의 이치다. 어찌 땅이 좁고 사람이 많다고 살림살이가 궁핍하고 가난하겠는가.

옛날을 살펴보더라도 백성이 정전제(井田制) 하에서 살아서 모두 농토를 지니고 살았다. 그리고 전쟁도 없고 전염병도 나돌지 않아 태평한 세월을 수백 년이나 누렸다. 이에 백성이 모두 천수(天壽)를 다하고 자손이 크게 번성했다. 그러나 천하의 농토는 늘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백성들은 9년분의 식량을 저축할 수 있었다.

아직껏 그들이 농토가 좁고 사람이 많아 곤란을 겪고 궁핍한 생활을 했다는 말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우서』 ‘사민총론(四民總論)’

유수원은 땅이 좁고 인구가 많은 것이 빈곤의 원인이 아니라 생산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경제 제도와 시스템이 빈곤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기름진 땅과 의식(衣食)의 자원이 결코 부족하지 않는데도 나라와 백성이 제대로 힘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여겼다.

만약 모든 백성이 사농공상의 직업에 따라 분업화하고 전문화한다면 오히려 사람이 많을수록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은 부유해진다는 것이 유수원의 생각이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을수록 농지는 늘고 곡식 산출량은 많아질 것이고,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물자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는 더욱 활발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빈곤의 원인을 자연과 인구가 아닌 경제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노동 의욕에서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유수원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 간 독창적이고 탁월한 경제사상가였는가를 알 수 있다.

유수원의 경제사상은 그가 죽고 난 후 활동한 북학파나 개화파 지식인들의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

상업적 농업의 장려, 농사 기술의 개선과 농기구의 개량, 수레와 선박을 이용한 육로와 수로의 운송망 건설, 상공업 진흥론, 양반상인론 등 유수원의 주장은 대부분 박지원과 박제가 그리고 박규수에게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북학파와 개화파 지식인들이 유수원의 사상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얼마든지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나 유수원이라는 이름 석 자는 북학파나 개화파 지식인들이 남긴 서적이나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유수원과 그들 사이의 사상적 유사성은 억측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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