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쓸쓸하게 살아갈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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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쓸쓸하게 살아갈망정…”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12.0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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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①
▲ 서계(西溪) 박세당과 저서 『서계유묵(西溪遺墨)』.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①

[한정주=역사평론가] ‘자의식(自意識)’이란 무엇인가? 그것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자신(혹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각적(自覺的) 의식’이다.

‘나란 누구인가?’ 혹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자각적 의식, 다시 말해 나는 어떤 존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스스로 갖고 있는 어떤 의식이 바로 자의식이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이 ‘나는 어떤 사람이다, 나는 어떤 존재이다’라고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확신하는 이른바 ‘자의식’이란 두 개 이상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 하나가 ‘타자화된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온전한 자아’이다.

‘타자화된 자아’란 말 그대로 타자(他者), 즉 다른 사람의 시선과 생각으로 자신을 보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생각에 지배당하는 자아를 뜻한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이란 사람들을 뜻하기도 하고, 사회와 체제와 이념을 뜻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 지식인(선비)들의 자기 정체성과 자의식은 성리학이 이상으로 여겼던 군자(君子)나 성현(聖賢)에 의해 지배당했다. 여기에서 군자나 성현이란 성리학에서 절대적 숭배 대상으로 섬기는 요순(堯舜)이나 주공(周公),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와 주자(朱子) 등을 말한다.

일찍이 조선 선비의 사표(師表)가 된 율곡 이이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성인(聖人)을 본보기로 삼아서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난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러한 조선 지식인(선비)의 자아상을 가리켜 ‘성리학적 존재 혹은 성리학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지식인(선비)은 성리학을 통해서만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들 지식인(선비)에게 ‘나’란 존재는 성리학에 의해 ‘타자화된 자아’이다.

반면 성리학의 시선과 생각에 지배당하는 타자화된 자아, 즉 성리학적 자아에서 벗어난-비록 소수이지만-조선의 지식인들의 자기 정체성과 자의식을 가리켜 필자는 ‘온전한 자아’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에서 ‘온전한 자아’란 어떤 것(이념·사상)도 장애가 되지 않고 어떤 것(사회·체제)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롭고 개성적이며 창의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17세기 말 주자성리학에 맞서 자유로운 학문과 사상 세계를 펼쳐보였던 서계(西溪) 박세당이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 ‘서계초수묘표(西溪樵叟墓表)’에 남겼던 “차라리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쓸쓸하게 살아갈망정 끝내 ‘이 세상에 나왔으니 이 세상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이 세상이 좋아하는 대로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마음을 낮추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에 담겨 있는 바로 그 자아의식이다.

“서계초수(西溪樵叟)의 성(姓)은 박(朴)이고, 그 이름은 세당(世堂)이다. 선조(先朝) 가운데 정헌공(貞憲公) 박동선과 충숙공(忠肅公) 박정이 나란히 인조 치세 때 벼슬과 명망이 높았다. 서계초수는 네 살 때 아버지 충숙공이 세상을 떠났고, 여덟 살에 외적(外賊)의 난리를 만나 외롭고 가난해 공부할 때를 놓쳤다. 10여 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형(仲兄)에게 처음 수업을 받았으나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다.

현종(顯宗)이 즉위한 원년인 32세 때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8~9년 동안 벼슬살이를 해보니 스스로 재주가 짧고 힘이 모자라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일도 날이 갈수록 무너지고 허물어졌지만 올바로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관직을 버리고 벗어나 동문(東門) 밖으로 물러 앉아 거처했다. 도성에서 30리 떨어진 수락산 서쪽 계곡 가운데 터를 잡고 그 골짜기를 석천동(石泉洞)이라고 이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서계초수라고 일컬었다.

개울가에 집을 짓고 울타리도 두르지 않았다.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은행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심어 그 집을 빙 둘렀다. 오이를 심고 밭을 일구며 땔나무를 팔아서 생계로 삼았다. 농사지을 달이 되면 몸을 항상 밭고랑 사이에 두고, 호미와 가래를 둘러멘 농부들과 어울리며 함께 일을 했다.

처음에는 조정에서 명을 내려 부르면 나아갔으나 나중에는 여러 차례 불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30여 년을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수명은 70세이다. 그가 살던 집의 뒤쪽 백 몇 십 보 떨어진 곳에 묻혔다.

일찍이 도리(道理)에 통달하고 조예가 깊은 논설(論說)을 지어 『시경』과 『서경』 그리고 『논어』·『맹자』·『대학』·『중용』 등 사서의 뜻을 밝혔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두 책에 주석을 달아 뜻을 드러냈다.

대개 맹자의 말을 깊이 좋아하여 차라리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쓸쓸하게 살아갈망정 끝내 ‘이 세상에 나왔으니 이 세상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이 세상이 좋아하는 대로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마음을 낮추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 뜻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서계집』, ‘서계초수묘표(西溪樵叟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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