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그 대상 사이의 불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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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그 대상 사이의 불일치’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06.26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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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⑭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사랑한다’는 말의 의미Ⅲ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 중에서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 중에서

[한정주=고전연구가] 캐서린 언쇼가 유모 넬리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하던 때 히스클리프는 우연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런데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언쇼의 말을 다 듣지 못했다. 그녀가 말한 “그런데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지지”라는 대목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더 이상 듣지 않고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큰 충격에 빠진 히스클리프는 그 길로 종적을 감춰버렸다. 히스클리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 캐서린 언쇼는 큰 슬픔에 잠긴다. 결국 그녀는 사랑의 열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된다.

하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어두워진 에드거 린튼은 캐서린 언쇼가 회복하기를 기다렸다가 결국 결혼한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히스클리프가 사라지면서 캐서린 언쇼의 사랑이 지닌 자기모순과 자기 분열은 겉으로는 해소된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라진 히스클리프가 캐서린 언쇼를 다시 찾아오면서 그녀의 욕망과 그 대상 사이의 모순과 분열은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사랑은 ‘욕망과 그 대상 사이의 불일치’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랑과 욕망’의 관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상대방에게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무엇인가가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라캉은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된 모습이 실재 상대방의 모습과 일치하면 사랑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욕망은 이미 ‘충족된 욕망’이기 때문이다. 마치 목이 말라 물을 갈망하는 사람이 물을 마시면 곧바로 갈증이 해소돼 더 이상 물을 갈망하지 않는 것처럼, 욕망은 충족되는 바로 그 순간 더 이상 욕망이 아니게 된다는 얘기이다.

반면 나의 욕망 속에서 상상하는 상대방의 모습이 실재 모습과 부합하지 않을 때 “그럼에도 상대방이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상상에 계속 집착할 때 사랑은 불꽃처럼 타올라 결코 꺼지지 않을 것처럼 강하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강신주 지음, 『철학 vs 철학』》, 오월의 봄, 2010, p496)

에드거 린튼에 대한 캐서린 언쇼의 욕망은 결혼과 동시에 이미 ‘충족된 욕망’이다. 반면 히스클리프에 대한 그녀의 욕망은 아직 ‘충족되지 않은 욕망’이다.

히스클리프가 돌아오고 나서 캐서린 언쇼는-만약 남편 에드거 린튼만 용납한다면-그가 이제 충분히 자신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있다고 상상한다. 워더링 하이츠로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히스클리프는 재력도 충분했고 교양도 갖추었으며 게다가 어느 누구도 업신여길 수 없는 위엄과 품격까지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드거 린튼이 히스클리프에 대한 캐서린 언쇼의 욕망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건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에밀리 브론테는 다시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심지어 자신보다 더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에밀리 브론테는 유모 넬리의 입을 빌려 항상 캐서린 언쇼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에드거 린튼의 사랑이 지닌 이기적인 성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간이란 결국은 자기 본위가 되고 마는가 보죠. 순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 해도 거만한 사람보다는 더 정당하게 이기적이라는 차이뿐이지요. 그리하여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서로 상대가 자기의 이해를 자기 위주로 생각해 주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을 때 그분들의 행복은 끝장이 났던 거랍니다.” (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p152)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자신보다 더 상대방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에드거 린튼이 아무리 캐서린 언쇼를 사랑한다고 해도 히스클리프에 대한 그녀의 욕망을 용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에드거 린튼이 캐서린 언쇼를 사랑하는 한 그의 욕망은 캐서린 언쇼 역시 자신을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로 사랑해주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에드거 린튼의 욕망과 캐서린 언쇼의 욕망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에드거 린튼이 사랑하는 것은 캐서린 언쇼일까 아니면 자신의 욕망일까.

어쨌든 라캉의 주장처럼 ‘충족된 욕망’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상상에 계속 집착할 때” 사랑은 더욱 강렬하게 빛을 발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남편 에드거 린튼과 연인 히스클리프 중 누구에게 캐서린 언쇼가 더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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