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암(順菴) 안정복③…18세기 지식인의 일그러진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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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順菴) 안정복③…18세기 지식인의 일그러진 자화상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20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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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㉙
▲ 성호 이익(왼쪽)과 제자 순암 안정복.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익이 앞서 안정복의 요청에 따라 써준 ‘순암기’를 읽어보면 그러한 사실을 더욱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이익은 ‘순암’의 뜻을 헤아리면서 제자의 마음이 어느 곳에 가 있는지를 간파했고, 그 뜻에 걸맞게 기문(記文)을 써서 보내주면서도 “성인(聖人)이 어찌 ‘내가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였겠는가? 대개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그렇게 되는 이치를 밝힌 것일 따름이다”라는 경계의 말을 덧붙였다.

예학(禮學)을 배우고 닦되 지나치게 그것에 빠져 미혹(迷惑)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나에게는 예(禮)를 공부하는 안씨(安氏) 아무개라는 벗이 있다. 그는 부지런하고 행실이 독실하다. 그는 ‘사람의 행실 중 조상을 추모하여 제사를 올리는 일보다 중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효자의 제사는 복(福)이 오는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복(福)이라는 것은 갖추어졌다는 것입니다. 갖추어졌다는 것은 모든 것이 순리(順理)에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덕(德)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순(順)이라고 하고, 또한 그 집의 이름을 순암(順菴)이라고 한 것입니다. 정성과 믿음이 움직이는 가운데 바깥으로 드러나야 살아 계실 때와 같이 나타나셔서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내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복(福)이란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다. 이른바 부귀영달(富貴榮達)과 같은 부류는 참으로 마음에 있어서는 안 되며, 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얻는 것도 아니고, 얻는다고 해서 반드시 편안한 것도 아니다.

가령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 그것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잡귀(雜鬼)나 역귀(疫鬼)의 부정함이 더해지는 것에 불과하다. 어찌 취하겠는가. 어질고 의롭고 충성스럽고 공경함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지 부모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성품이다. 가장 귀중한 것은 내 안에 있다.

더러 그것을 얻지 못한 자가 있다면 사람의 노력이 미치지 못한 것이지 하늘 때문은 아니다. 사람은 통하지 않는데 귀신은 반드시 통하는 것을 신명(神明)의 힘이라고 말한다. 성인(聖人)이 어찌 ‘내가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였겠는가?

대개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그렇게 되는 이치를 밝힌 것일 따름이다’라고 적어 주었다.” 『성호전집』, ‘순암기’

여기에는 안정복의 삶과 내면을 지배했다고 할 수 있는 ‘예(禮)의 철학’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안정복은 ‘사람의 행실 중 조상을 추모하여 제사를 올리는 일보다 중대한 것’은 없고, ‘효자의 제사는 복이 오는 도리’이고, ‘복(福)이라는 것은 갖추어졌다는 것’이고, ‘갖추어졌다는 것은 모든 것이 순리(順理)에 따른다는 것’을 형용하므로, 그 덕(德)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순(順)’이라고 여겨서 자신이 거처하는 집의 이름은 물론 호까지 ‘순암(順菴)’이라고 지은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천주(天主)를 숭배하면서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를 비판하거나 배척하기까지 한 천주교의 교리나 학설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서양의 학문을 모두 천주교에서 나온다고 여겨 이단의 학문일 뿐이라고 비난했던 사람이 어떻게 종교와 학문-지식을 분리시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었겠는가?

안정복은 이익을 따라 배웠다고 하지만 새롭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학풍보다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유학이나 주자학의 그늘 속에 여전히 갇혀있던 사람이었다. 그것은 주자학과 천주학 또는 유학과 서학 사이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한 18세기 지식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었다.

그러나 이익의 학풍은 서학을 비롯해 천주교와 양명학 등 당시 성리학자(주자학자)들이 배척한 이단과 사설(邪說)의 학문에 대해서도 매우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입장과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이익이 살아있을 때 성호학파 내부에는 예학에서부터 천주학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학문과 지식 경향이 크게 대립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었다.

18세기 조선의 지식혁명을 이끈 성호학파의 힘은 바로 거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익이 세상을 떠나자 성호학파는 크게 갈등을 겪고 분열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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