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재(瓛齋) 박규수…“벼슬하는 사람은 집에서조차 나라와 백성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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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瓛齋) 박규수…“벼슬하는 사람은 집에서조차 나라와 백성을 생각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5.12 0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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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90)
▲ 환재 박규수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환경(桓卿), 환경(瓛卿), 정경(鼎卿).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18세기 실학사상과 19세기 개화사상의 가교 역할을 한 대학자이자 선각자이다.

김옥균 등 개화파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박규수의 제자였다.

나이 60세인 1866년(고종 3년) 평안도관찰사로 재임할 때 대동강으로 무단 진입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격퇴했으나 1872년 사신으로 간 청나라에서 양무운동을 목격하고 개항과 개국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귀국 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맞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개국의 필요성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75년(고종 12년)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김옥균, 김윤식, 유길준, 박영효 등에게 『연암집(燕巖集)』과 『해국도지(海國圖志)』 그리고 지구의(地球儀) 등을 보여주면서 만민평등사상과 개화사상을 설파하는 한편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살펴 행동하라고 가르쳤다.

그의 사상은 ‘통상 개화를 통한 자주적인 부국강병(富國强兵) 건설’에 있었다.

그는 일찍이 20세 때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와 ‘개혁의 뜻’을 함께 할 때부터 평생 나라와 백성을 걱정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지사였다.

효명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20여 년 가깝게 두문불출하다가 다시 벼슬길에 나선 이후에도 오로지 백성의 비참한 삶을 해결할 대책과 자주적인 역량을 키워 나라의 운명을 개척할 방법을 찾는데 온 힘을 쏟았다.

박규수의 호 ‘환재(瓛齋’에도 그의 남달랐던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뜻이 잘 새겨져 있다. ‘환(瓛)’은 벼슬아치가 조복(朝服)이나 관복(官服)을 착용하고 임금 앞에 나아갈 때 손에 들고 있는 옥으로 만든 옥홀(玉笏)을 뜻하는 글자다.

따라서 환(瓛)은 ‘벼슬하는 사람’을 뜻하고, ‘환재(瓛齋)’는 ‘벼슬하는 사람의 집’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조정에서 물러나 집에 머무를 때조차도 벼슬하는 사람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그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주는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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