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晦齋) 이언적① 임금이 바꾼 이름, ‘적(迪)→언적(彦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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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晦齋) 이언적① 임금이 바꾼 이름, ‘적(迪)→언적(彦迪)’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7.31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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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⑫ 선비정신의 사표, 동방 사현(四賢)⑥
▲ 경주 양동마을

[헤드라인뉴스=한정주 역사평론가] 이언적은 1491년(성종 22) 경주부(慶州府) 양좌촌(良佐村)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이곳이 현재 조선 시대의 전통 문화와 선비 정신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은 오랜 세월 이언적의 외가(外家)인 경주(慶州) 손씨(孫氏)와 친가(親家)인 여강(麗江) 이씨가 더불어 세거지로 삼은 집성촌락이다. 특히 이 마을은 뒷산인 설창산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이른바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룬 명당이다.

명당의 지세(地勢) 탓인지 양동마을에서는 현달(顯達)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이 선비 문화와 정신을 대변하는 ‘살아있는 현장’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사림의 사표(師表)인 ‘동방사현(四賢)’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이언적이라는 명사(名士)가 있었기 때문이다.

열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이언적은 외가에 의탁해 성장했다고 한다. 학문 역시 외삼촌인 우재(愚齋) 손중돈을 통해 배웠다.

손중돈은 김종직의 문하(門下)에 드나들면서 유학을 익히고 성리학의 글을 배운 사림의 문사(文士)였다. 이언적은 손중돈을 통해 김종직으로부터 발원하는 사림의 학통(學統)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외삼촌 손중돈 외에 이언적에게 학문적·정치적 영향을 끼친 이는 기묘사화 때 화란(禍亂)을 입은 ‘기묘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인 모재(慕齋) 김안국이다. 김안국은 이언적이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을 때, 장차 ‘임금을 돕고 사림을 크게 일으킬 재목’임을 알아보고 이언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 무렵 이언적은 나라와 왕실의 재앙이 간신배들의 입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이구복방가부(利口覆邦家賦)’를 지어 일찍부터 권세와 이익을 원수 보듯 대하는 반면 절의(節義)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선비 정신을 보여주었다.

▲ 회재(晦齋) 이언적
“세상에서 왕실과 나라에 재앙이 되는 것은 참으로 한 가지가 아니네. 멀게는 오랑캐가 국경을 엿보는 것이고, 가깝게는 간사하고 흉악한 자가 분수에 맞지 않는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네. 서로 던지고 다투는 사이에 배척하고 불화하여 번갈아서 해충이 되고 도적이 되네.

그러나 누르거나 어루만져 제재하고 복종하게 하는 도리가 있으니, 이 또한 우려할 것이 없네. 예측 불가한 재앙과 난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간사하고 이로움을 말하는 입에 감추고 있는 것이 사나운 짐승이고 독약이네. 부서지고 깨지는데 이르지 않는 것이 없구나.

처음에는 달콤하고 겸손한 언사(言辭)로 시작하니, 진실로 두려워할 만한 자취를 찾을 수 없네. 그러나 정치를 어지럽히고 법도(法度)를 무너뜨리는 데에 이르네. 참담한 재앙을 비로소 깨닫지만 누가 나라가 뒤집히는 것을 헤아리겠는가.

쥐의 이빨로 말미암아 구멍이 나듯이 거기에서 재앙이 찾아오네. 세치의 이로운 혓바닥으로 절절(切切)하게 말을 꾸미는구나. 네 필의 말(馬)로도 따라가지 못하는구나. 간사한 마음을 춤추게 하고 교묘하게 꾸민 말로 영합(迎合)하여 소곤대네. 매번 말을 뒤집고 주장을 바꾸면서 분간하기 어렵게 이리 둘러대고 저리 둘러대며 온갖 거짓말을 일삼네.

잠깐 임금의 주변에 있게 되면 달콤하기가 감주(甘酒) 같아 임금의 귀에 쉽게 들어가서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이 바뀌고, 희고 검은 것과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뒤집히네.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붕당(朋黨)이라 모함하고 바르고 곧은 사람을 간사하고 거짓된 사람으로 만들어 봉황과 참새도 분간하지 못하니, 누가 밝은 구슬과 율무를 살피겠는가?

임금의 마음이 이렇듯 현혹(眩惑)되면 나라의 정치가 혼란해지고 무너지네. 잘 걸러진 술이 사람의 입에 들어감이여. 그 맛이 좋아 취하는 줄 모르네. 쇠약해지고 어지러워 구할 수 없게 되니 위급함에 이르러 죽게 되네. 크구나. 천하 국가의 큰 근심이여. 사람의 입에서 생겨나서 입 밖으로 드러날 때에는 아주 작아 보이지만, 사람에게 재앙을 입히는 것은 아주 크네. 현명한 임금이라면 환히 봐야 하지 않겠는가?

…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나라를 다스릴 때 반드시 시무(時務)의 최우선으로 아첨을 멀리하고 다스림을 돕는 좋은 말을 따르네. 참언(讒言)이 어지럽게 행해지는 것을 배척하고 지극한 밝음으로 간흉(姦凶)들을 비추니, 입에 이로운 온갖 말이 무엇을 어찌 하겠는가?

… 거듭해서 말하니, 간사한 입을 가진 사람은 칼날과 같은 혀를 갖고 있어서 도(道)를 훼손하고 이치를 해쳐서 임금을 어둡게 하고 재앙을 만드니, 환란(患亂)이 처음 일어나는 것이 어찌 이로부터 말미암지 않겠는가. 경계하라! 임금이여. 이로움을 말하는 입을 제거하는 것에 의심을 두지 말라. 그 입이 한번 열리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 『회재집』, ‘이로움을 말하는 입이 나라를 망친다(利口覆邦家賦)’

또한 27∼28세 때에는 셋째 외삼촌인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오고 간 조선 유학사상 최초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참여해 독자적인 철학적 견해를 내보이는 것으로 성리학에 대한 사림의 지적 수준을 크게 일으켰다.

이 논쟁의 와중에 할아버지 이수회의 상(喪)을 당했는데,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이 때문에 다음해 사림을 발칵 뒤집어놓은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1521년 8월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에 올라 조정에 다시 나간 이언적은 이때 중종의 명에 따라 이름에 ‘언(彦)’자를 더했다.

이전까지 그의 이름은 이언적이 아닌 이적(李迪)이었는데, 중종이 단성(丹城) 출신의 어떤 사람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선비’라는 뜻을 가진 ‘언(彦)’자를 사용하게 해 비로소 ‘이언적(李彦迪)’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중종은 비록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림의 인사들을 내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림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유학의 나라인 조선의 왕이 사림과 유생(儒生)을 배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종은 당시 사림의 신망을 받던 이언적을 중용했다.

이언적이 훗날 인종(仁宗)이 되는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의 설서(設書)에 임명된 이유 역시 이러한 중종의 복잡한 계산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1530년(나이 40세)까지 이언적은 육조(六曹)와 삼사(三司)의 요직을 거치면서 비교적 순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그러나 1531년 1월 자신의 아들이 중종의 사위가 되는 권간(權奸) 김안로가 세자를 가르치고 돌보는 실질적인 후견인에 다름없는 세자 보양관(輔養官)을 맡게 되자, 이언적은 외척(外戚)과 간신배의 발호를 지켜보고 만 있을 수 없어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이 일로 이언적은 사간원 사간(司諫)에서 성균관 사예(司藝)로 좌천당했고, 얼마 뒤 김안로를 따르는 간신배들의 탄핵으로 파직 당하자 아예 벼슬에 대한 미련을 내동댕이치고 낙향해버렸다.

당시 이언적은 ‘마음을 맑게 하는 대(臺)’라는 뜻의 ‘징심대(澄心臺)’를 빌어 자신이 한양을 버리고 낙향하는 까닭은 권간(權奸)의 탄핵과 중상모략 때문이 아니라-일찍부터 꿈꿔 온-마음을 맑게 하는 도학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징심대(澄心臺) 가의 나그네 돌아갈 마음 잊었는데 / 바위 주변의 달은 몇 번이나 둥근 원(圓)을 만들었네 / 개울은 깊어 물고기 맑은 물에서 노닐고 / 산은 어두워 새는 안개 속에서 헤매네 / 사물과 내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니 / 나아감과 물러남은 단지 하늘의 뜻을 즐길 뿐 / 천천히 거닐며 그윽한 흥에 기대니 / 마음은 저절로 한가롭고 여유 있네.” 『회재집』, ‘징심대의 풍경(澄心臺卽景)’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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