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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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을 위하여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08.2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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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⑮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나는 ‘실격당한 인간’을 희망한다Ⅴ
오구리 슌 주연 일본 영화 인간실격 중에서
오구리 슌 주연 일본 영화 <인간실격> 중에서

[한정주=고전연구가] ‘실격당한 인간’을 상상하고 희망하는 삶은 고통을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한 삶이다. 우리는 멀게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또한 가깝게는 주변의 모든 개인들로부터 끊임없이 표준 인간의 삶을 강요당하며 살아야 한다.

표준 인간의 삶을 거부하거나 부정한다는 것은 용기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특히 가까운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강요와 억압은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정신은 물론 육체까지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실격당한 인간을 상상하고 희망하는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개인들의 대양(大洋)에 빠져 죽지 않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 개인들의 대양은 다르게 표현하면 표준 인간들의 집합체이고, 이 표준 인간들의 집합체가 바로 세상, 즉 국가와 사회이기 때문이다.

요조는 나름대로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뻔뻔함’이다. 표준 인간들의 집합체가 ‘실격당한 인간’에게 퍼붓는 저주의 주문과 욕설, 즉 조롱, 모욕, 배척, 혐오, 공격을 감당하려면 ‘뻔뻔함의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격당한 인간이 표준 인간들의 집합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뻔뻔함의 무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 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은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인간실격』, 민음사, 2004, p97)

군국주의와 전쟁국가 일본에서 황국신민과 전쟁기계로 살지 않기 위해 개인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일본 제국이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욕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법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철저하게 파괴해 쓸모없도록 만들 때만 제국의 욕망에서 벗어나 인간 본성을 지킬 수 있었다.

요조의 시대, 다시 말해 다자이 오사무의 시대는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고 파멸시켜 몰락해야만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잔혹한 역설이 성립하던 시대였다. 요조가 퇴폐와 타락의 삶, 즉 알코올 중독, 모르핀 중독, 자살 중독으로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고 결국 미치광이 폐인이 되어 인간 실격에 이르게 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실격당한 인간’ 요조는 ‘인간적이어도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다.

앞서 『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성격의 소설이라고 언급했다. 소설 속 요조의 삶은 곧 다자이 오사무의 삶이다. 자기 부정과 자기 몰락을 추구한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철저하게 타락시켰다. 그것은 자신을 황국신민과 전쟁기계로 길들이려고 하는 국가와 사회의 욕망을 파괴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수단이었다.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유 역시 『인간실격』에서 요조가 말한 것처럼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도망칠 최후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옥 같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이면서 동시에 지옥 같은 세상에 맞서는 저항이었다. 그런 점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은 곧 국가의 노예에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재탄생하는 자기 구원의 길이자 인간 구원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표준 인간은 무엇인가. 자본의 이윤 창출을 위해 노동하는 인간이다. 그럼 실격당한 인간은 무엇인가. 자기의 가치 창조를 위해 노동하는 인간이다.

쉽게 말해 전자는 돈벌이가 유일한 목적인 노동을 하는 인간이고 후자는 돈벌이와 상관없이 노동하는 인간이다. 돈과 상관없이 노동한다는 것은 곧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또한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버는 노동만 노동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돈도 안 되는 쓸모없는 짓이나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자본의 이윤 창출에 종속된 노동만 노동이라고 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정·학교·사회·국가가 일찍부터 우리를 자본주의가 원하는 인간 모델로 훈육·양성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이 ‘자본주의의 인간 모델’을 표준으로 삼아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의 이윤 창출에 종속된 인간(예를 들면 국가 혹은 회사에 고용되어 노동하는 인간)은 ‘표준 인간’, 그리고 이 기준에서 탈락한 인간은 ‘잉여 인간’ 취급을 한다.

여기에서 잉여 인간의 개별적·단독적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에 ‘실격당한 인간’은 곧 자본의 이윤 창출에 종속되는 노동을 거부하는 인간, 다시 말해 자기의 개별적·단독적 가치 창조를 위해 노동하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인간실격』의 히어로 요조의 타락과 파멸을 지켜보고 있으면 다자이 오사무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당신은 국가와 사회가 정한 기준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표준 인간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실격당한 인간의 삶을 살겠습니까?”

표준 인간 vs 인간 실격, 무엇이 더 인간적인 삶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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