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설과 다변으로 버무려진 현대미술의 피곤을 덜어내고 조형 자체가 지닌 감각과 인식, 형상에 대한 근원적 동경을 되새겨 보는 전시회가 열린다.
OCI미술관은 다음달 1일부터 12월22일까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개최한다고 30일 밝혔다.
전혜린의 수필집과 독일의 문인 하인리히 뵐의 동명 소설에서 전시 제목을 가져왔다. 박기원, 장승택, 전명은, 조소희 4명의 작가가 참여해 ‘침묵’을 주제로 작품 세계를 펼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붉은빛의 강렬한 인상으로 공간을 압도하는 작품은 박기원의 ‘안개(Fog)’다. 전시장 1층과 2층이 뚫려있는 OCI미술관의 특징을 극대화한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으로 LED 전구 320여 미터와 비닐을 사용했다.
비물질적인 요소로 공간을 채우고 싶다는 작가의 의도처럼 하늘하늘 일렁이는 작품의 움직임과 볼륨, 주변을 물들이는 색상이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1층 전시장의 안쪽으로는 장승택의 회화 작업이 관객을 맞이한다. 고요하게 공간을 점유하는 단색조의 작업으로 얼핏 검은색인가 싶어서 다가가 보면 초록, 보라 등 이런저런 색상이 유령처럼 깊숙이 웅크리고 있다.
재료도 일반적인 캔버스 천이 아닌 폴리카보네이트 계열을 사용해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개척했다. 포스트 단색화로 분류되기도 하는 그의 작업은 회화가 담을 수 있는 인식과 사색의 심연을 보여준다.
2층 전시장의 한 편을 아늑하게 보듬는 설치 작업은 조소희의 섬세한 손길로 탄생했다. 쉽게 지워지는 연필선, 가느다란 실 가닥 등 취약하고 여린 것들이 모여 육중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읽을 수 없는 글귀를 품고 모양이 없는 공기와 중력을 작품에 담아 비가시적인 세계를 시각적이며 촉각적으로 드러낸다.
오랜 시간과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작업이며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 무거움과 가벼움,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 지점, 그 어렴풋한 자리”가 “침묵의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작가의 생각이 녹아들어 있다.
3층은 사진작가 전명은의 작업으로 채워졌다. 무심하게 서있는 석고 모형의 뒷모습을 모노톤으로 찍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조각가가 제작한 오래된 석고 모형과 원형을 촬영한 것으로 그저 덩그러니 놓인 석고 덩어리인데 그 표정이 여간 풍부한 것이 아니다.
석고 모형과 모형 사이, 시간과 시간의 사이, 조각과 사진 사이에서 형성되는 사물의 언어가 흥미롭다. 이 연작은 작가가 2016년부터 발표하고 있는 ‘누워 있는 조각가의 시간’ 중 일부로 이번 전시와 연계해 별도의 300부 한정판 사진집도 발행했다.
각기 다른 매체와 기법으로 표현된 이번 전시는 ‘말이 없는’ 미술의 기본으로 돌아가 보고자 하는 시도다. 함부로 말하려 들지 않고 쉽게 설명되지는 않으나 진실하게 이미지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는 작업으로 전시가 관객을 미술의 침묵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임을 살펴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