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쩍 않던 온달장군의 관이 평강공주 한마디에 움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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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쩍 않던 온달장군의 관이 평강공주 한마디에 움직인 이유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3.06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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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24강 염의편(廉義篇)…청렴하고 의롭게 살아라③
아차산 등산구 입구에 세워진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상.
아차산 등산구 입구에 세워진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상.

[한정주=역사평론가] 高句麗平原王之女(고구려평원왕지녀)는 幼時(유시)에 好啼(호제)러니 王(왕)이 戱曰(희왈) 以汝(이여)로 將歸愚溫達(장귀우온달)하리라 及長(급장)에 欲下嫁于上部高氏(욕하가우상부고씨)한대 女以王不可食言(여이왕불가식언)으로 固辭(고사)하고 終爲溫達之妻(종위온달지처)하니라 蓋溫達(개온달)이 家貧(가빈)하여 行乞養母(행걸양모)러니 時人(시인)이 目爲愚溫達也(목위우온달야)러라 一日(일일)은 溫達(온달)이 自山中(자산중)으로 負楡皮而來(부유피이래)하니 王女訪見曰(왕녀방견왈) 吾乃子之匹也(오내자지필야)라하고 乃賣首飾而買田宅器物(내매수식이매전택기물)하여 頗富(파부)하고 多養馬以資溫達(다양마이자온달)하여 終爲顯榮(종위현영)하니라.

(고구려 평원왕의 딸은 어렸을 때 매우 잘 울었다. 왕은 잘 우는 공주를 놀리면서 “크면 너를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말하였다. 공주가 성장하자 왕은 상부(上部) 고씨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주는 임금은 식언(食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고씨에게 시집가기를 한사코 마다하였다.

마침내 온달의 아내가 되었다. 온달은 집이 가난하여 구걸을 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온달이 산 속으로 들어가 느릅나무 껍질을 짊어지고 돌아오는데 공주가 찾아와서 “나는 당신의 아내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주는 자신의 머리장식을 팔아서 밭과 집 그리고 살림도구 등을 샀다. 이에 온달의 집은 매우 부유해졌다. 또한 많은 말을 길러서 온달을 도와 마침내 이름을 드날리고 빛나게 하였다.)

평원왕(재위 559∼590년)은 고구려 제25대 왕으로 일명 평강왕(平康王)이다. 평원왕의 딸은 평강공주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된 고사는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이다.

이 기록은 김부식이 편찬 저술한 『삼국사기』 <열전> ‘온달’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옮겨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명심보감』의 엮은이는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놓은 것인가. 앞서 홍기섭과 도둑 유씨의 이야기가 제24강의 주제인 ‘염의(廉義)’ 중 ‘염(廉)’, 즉 ‘청렴함’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는 ‘의(義)’, 즉 ‘의로움’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첫 번째 ‘의로움’은 평강공주가 자신의 아버지 평원왕(평강왕)에게 한 “임금은 식언(食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는 말에 담긴 뜻으로, 여기에는 비록 임금이라고 할지라도 한 번 한 말(약속)은 결코 어길 수 없다는 ‘신의(信義)’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두 번째는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찾아와서 한 말인 “나는 당신의 아내입니다”라는 말에 담긴 뜻으로, 여기에는 비록 어렸을 때 아버지가 식언(거짓말)으로 한 말(약속)이라고 해도 부부의 인연은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의리(義理)’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신의와 의리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이야기’가 후세 사람들에게 ‘신의와 의리’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보도록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온달의 최후를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온달은 평원왕(평강왕)이 죽고 그의 아들이 새로운 임금으로 즉위하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오겠다면서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때 온달은 만약 계립현(鷄立縣)과 죽령(竹嶺) 이서 지역을 되찾지 못한다면 다시 고구려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러나 온달은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전사한 온달의 시신을 고구려로 옮겨 장사지내려고 했지만 그의 시신을 담은 관이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온달은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고구려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죽어서까지 지키려고 한 것이다. 이 맹세에는 온달과 고구려, 온달과 임금, 온달과 평강공주 사이의 ‘신의와 의리’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온달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는가. 평강공주가 직접 찾아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한 일이니 그만 돌아가자’고 하자 비로소 온달의 시신이 움직였다. 여기에도 또한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의리’의 뜻이 담겨 있다.

아내 평강공주와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해 죽어서까지 고구려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던 온달의 뜻을 ‘부부 사이의 의리’를 지킨 것으로 볼 수 있듯이 평강공주가 직접 찾아와 그만 돌아가자고 하자 비로소 고구려로 돌아간 온달의 뜻 역시 ‘부부 사이의 의리’를 지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삼국사기』 <열전>을 살펴보면 ‘온달’의 전기가 다른 어떤 인물의 전기보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더욱이 고문(古文) 비평가들에 의하면 ‘온달’의 전기는 <열전> 중에서도 최고의 명작 중 한편이라고 한다.

『삼국사기』를 편찬 저술한 김부식이 ‘온달’의 전기에 어떤 인물의 전기보다 심혈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김부식이 그렇게 한 까닭은 온달과 그의 아내 평강공주의 이야기가 유학이 최고의 덕목이자 가치로 삼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의(義)’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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