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 막으려 선언한 양위…“임금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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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 막으려 선언한 양위…“임금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1.1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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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읽기>② 영조의 양위(讓位) 소동과 탕평정치(蕩平政治)
▲ 영조대왕 친영반차도
◇ 글 싣는 순서
① 노론 당적의 왕세제(王世弟) ‘연잉군’
② “이복 형(경종)을 독살했다”는 비난 속에 왕위 오르다
③ 그치지 않은 경종 독살 비난…이인좌의 난과 탕평정국   
④ 당쟁을 막으려 선언한 양위…“임금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⑤ 좌절당한 탕평 세상과 다가오는 비극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러나 영조가 새로이 연 ‘탕평정국’에도 불구하고 노론과 소론의 해묵은 대립과 갈등은 결코 누그러지지 않았다. 수 십 년 동안 서로가 서로의 부모와 형제를 향해 휘두른 당쟁의 칼날과 피바람은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의 관계를 화해 불가능한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탕평책의 시작인 ‘기유처분(己酉處分)’ 이후에도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그치지 않자 1733년(영조 9년) 1월 영조는 소론의 영수 이광좌와 노론의 영수 민진원을 함께 불러 들여서 오른손으로는 이광좌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민진원의 손을 잡고서 서로의 감정을 풀게 하였다.

그러나 이광좌와 민진원은 서로에 대한 의심과 죄목을 논하면서 오히려 영조에게 잡은 손을 놓아줄 것을 청하며 화해하기를 거부했다. 노론과 소론의 화해를 모색한 영조의 탕평책은 이렇듯 번번이 당론(黨論)과 당쟁(黨爭)의 장벽 앞에서 좌절당해야 했다.

영조 15년(1739년) 1월 일어난 영조의 첫 ‘양위 선언’ 역시 신축년(辛丑年: 경종 1년)의 상소와 임인년(壬寅年: 경종 2년)의 옥사로 역적의 죄를 입은 노론계의 신료(臣僚)들을 신원하려는 처사에 반발하는 소론에 대항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미 조선의 당쟁(黨爭)은 노론이 충신이 되면 곧바로 소론은 역적이 되고, 반대로 소론이 충신이 되면 다시 노론은 역적이 되어야 하는 형국에 접어든 지 오래였다.

그해 1월11일 영조는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뜻을 밝힌 비망기(備忘記)를 승정원에 내렸다. 그때 세자의 나이 겨우 다섯 살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억지였다. 당시 영조가 비망기에 밝힌 선위의 까닭은 이랬다.

“내가 즉위한 지 15년이 되었다. 임금의 자리가 어떤 자리이겠는가마는 나는 초개처럼 여길 뿐이다. 황형(皇兄: 경종)에게 후사가 있어 우리 집을 삼가 지키는 것이 바로 내 본심인데, 열조(列祖)께서 도우시어 다행히 원량(元良)이 있어서 이제는 다섯 살이 되었다. 아! 효장세자가 살아있다면 어찌 오늘까지 기다렸겠는가? 내가 짐을 벗더라도 어찌 백성을 소홀히 하겠으며, 나라의 긴요한 일도 어찌 걱정하지 않겠는가?” 『영조실록(英祖實錄)』15년(1739년) 1월11일

왜 선위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은 임금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과감하게 물러나겠다는 것이었다.

영조의 명을 접한 신하들이 앞 다투어 도로 거두기를 청하고 승지 오언주가 ‘탑전(榻前)에 두고 물러가겠다’고 버티자 영조는 “열 번 올리더라도 내가 열 번 내리겠다”면서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 후 조정 대신과 6부의 수장 그리고 삼사의 관리를 비롯한 60여명의 신하들이 몰려와 명을 거두기를 힘껏 청했지만 영조는 “이 일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면서 선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우의정 송인명이 나서 “지난 일들을 신들은 모두 잊었는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깊이 속마음에 두셨으니, 이런 망극한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조는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쳐보였다.

“사람들은 내가 원보(元輔: 영의정 이광좌)를 부르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어찌 원보 한 사람을 위해 이런 일을 하겠는가?”

이 말을 듣고서 다시 우의정 송인명이 아뢰었다. “신이 전하께서 고심하시는 것을 모른다면 먼저 주륙당해야 할 것입니다. 온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진 뒤에야 하교를 도로 거두신다면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이에 영조는 버럭 화를 냈다. “이미 나를 임금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무슨 소란스러울 일이 있겠는가?”

영조와 우의정 송인명 사이에 오간 대화를 살펴보면, 이때 영조가 선위하겠다고 한 까닭이 당시 원보(元輔: 영의정)였던 이광좌에게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조와 이광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영조 어진

영조와 소론 온건파의 영수였던 이광좌가 대립한 까닭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시계 바늘을 한 달 전인 영조 14년(1738년) 12월10일자로 돌려놓아야 한다.

이날 영조는 왕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어머니인 잠성부부인 이씨 곧 자신의 장모의 죽음을 위로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경종 2년(1722년) 임인옥사로 죽임을 당한 처조카 서덕수를 신원 조치했다. 서덕수는 사람됨이 어리석어서 속임을 당한 것에 지나지 않고 신원해주지 않으면 잠성부부인의 마음을 위로해 줄 길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소론의 시각에서 볼 때 영조의 조치는 임금(경종)을 능멸하고 암살을 모의한 역적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인년 옥사를 주도한 소론의 정당성에 흠집을 내는 행위였다.

서덕수가 대체 누구였는가? 그는 영조의 왕세제 책봉 당시 노론의 밀사로 나서 영조에게 다음 보위에 오르라고 제의한 인물이었다. 또한 임인옥사를 다룬 사건 보고서에 따르면 서덕수는 경종 암살 계획 가운데 소급수(小急手) 곧 ‘독약을 쓰는 흉모’에 적극 가담한자였다.

그런데 영조에게 서덕수의 신원이 중요했던 까닭은 단지 장모인 잠성부부인 이씨와의 개인적인 정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덕수는 영조의 왕세제 책봉 때 일등공신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임인옥사’ 때 연잉군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밝힌 장본인이었다.

따라서 영조의 입장에서 볼 때 서덕수의 신원(伸寃)은 왕세제 책봉의 정당성과 함께 자신에게 씌워진 역모 혐의가 무고임을 입증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소론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총대를 영의정 이광좌가 멘 것이다. 노론과의 화해를 거절한 소론의 영수 이광좌로서는 어떻게든 자신들의 과거 행위가 정당했다는 당론(黨論)을 지켜내는 것이 곧 노론과의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광좌는 즉시 영조에게 사직을 청하고 물러났다. “나를 임금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무엇 하겠는가?”라고 한 영조의 말은 곧 당쟁에 얽히고 당론에 갇혀서 자신의 처조카조차 마음대로 신원(伸寃)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역모 혐의도 마음대로 벗어버리지 못하는 정치 상황에 대한 분노였다.

영조의 선위 소식을 접한 이광좌는 그때 동작강(銅雀江) 근처에 있다가 신하들 중 가장 늦게 입궐했다. 이때 이광좌는 울부짖으면서 영조가 선위하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라고 했고, 이어 이조 판서 조현명 등 수십 명이 전(殿)에서 내려가 관을 벗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신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고 외쳤다.

영조는 이쯤 되면 자신의 뜻이 신하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에 위로 대비께서 근심하시고 아래로는 세자를 괴롭히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면서 선위하겠다는 명을 거두었다.

이후 영의정 이광좌가 예조판서 윤순 등과 함께 선왕(先王) 숙종의 전례를 따라 영조에게 경사를 칭하고 진하(陳賀)하기를 청했다. 경사를 칭하고 진하(陳賀)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영조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유독 이조판서 조현명만은 신하들의 뜻을 꺾기 위해 일으킨 영조의 ‘양위 소동’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신은 전하께서 애초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하셨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후 15년 동안에 이와 같은 일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문을 닫는 것으로 모자라면 음식을 물리치셨고 음식을 물리치는 것으로 모자라면 보위를 사양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전하께서는 하루아침의 담소(談笑)로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원량(元良)에게 임금의 자리를 맡기려 하셨습니다. 대저 더없이 어려운 것이 천위(天位)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전하의 장난감이겠으며 경솔히 그렇게 하십니까?” 『영조실록(英祖實錄)』15년(1739년) 1월15일

▲ 영조의 어제어필(御製御筆)이 적힌 필첩(筆帖).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실제 영조는 이보다 2년 앞선 1737년(영조 13년) 8월9일부터 나흘 동안 ‘임인옥사’ 때 처형당한 노론 4대신을 둘러싼 당쟁이 날로 격화되자 궐문을 폐쇄하고 단식을 불사하는 투쟁을 벌여 자신의 뜻과 의지를 관철시킨 적도 있었다.

어찌 보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임금이 신하들을 상대로 ‘생떼’를 부린 듯이 보이겠지만, 당시 조선의 임금은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임금의 명(命)보다 자신이 속한 당파의 당론(黨論)을 더 두려워하는 신하들을 다룰 수 없을 만큼 궁색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해 8월28일 영조는 “오늘 이전의 일은 혼돈(混沌)에 부치고 오늘 이후는 개벽(開闢)이니 다시는 편당(偏黨)을 짓지 말라”는 유시를 내렸다. 지난날은 당쟁으로 혼란한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는 당쟁이 없는 개벽 세상을 열 것이므로 노론이든 소론이든 당습(黨習)과 당론(黨論)을 앞세워 임금의 뜻을 꺾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임금의 뜻과 명(命)으로는 꺾을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것이 당론(黨論)과 당쟁(黨爭)이었다.

영조가 처음 양위 소동을 일으킨 지 1년 만인 1740년(영조 16년) 5월 또 다시 선위하겠다고 밝힌 이유 역시 자신에게는 더 이상 ‘당론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론에 맞서 임금이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양위 카드’를 해를 거듭해 사용해야 할 만큼 당시 당쟁의 기세는 날로 위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 해(1740년) 5월25일 영조는 창덕궁의 선원전으로 가서 부왕(父王) 숙종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문밖에 자리를 깔고 북쪽을 향해 엎드렸다. 이 날은 큰 비가 쏟아져 영조는 진흙탕 한 가운데에서 어의(御衣)가 다 젖도록 꿇어 앉아 있었다. 도승지 신만이 가서 보니 영조는 엎드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에 신만이 울면서 말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차마 이런 일을 하십니까?”

도승지의 물음에 영조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시상(時象: 당론)을 잘 조합해 다스리지 못하니, 성고(聖考: 숙종)께 하직하고 물러나 임금의 짐을 벗어 세자에게 맡기기로 뜻을 정했다.”

당론을 앞세우는 신하들 때문에 도저히 정사(政事)를 돌볼 수 없으므로 그냥 물러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영조는 주서(注書) 안치택을 불러서 대신들을 불러들이라고 명했다.

영조가 선위하겠다는 뜻을 다시 끄집어냈다는 말에 놀란 신하들은 앞을 다투어 한꺼번에 몰려왔다. 진흙탕에 꿇어 앉아 있는 영조의 모습을 본 신하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편안히 앉아서 하교하십시오.”

그러나 영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병조판서 조현명이 큰 소리로 대비에게 아뢰어 임금의 행동을 빨리 중단시키라고 대신들에게 청했다. 이에 좌의정 김재로가 급히 대비에게 청대했고, 그 사이 신하들은 영조의 주위를 빙 둘러서서 소리 내어 울었다.

이윽고 영조가 눈물을 흘리다가 일어나 걸어 나가자 대신 이하가 부축하고 호위하며 따랐다. 영조가 처마 밑 툇마루에 이르러 다시 북쪽을 향해 꿇어 엎드리자 그곳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죄를 청했다.

이때 송인명이 나서 “이러한 모습을 보고도 참으로 느끼지 못하고서 다시 당론(黨論)을 하는 자가 있다면 중률(重律)로 다스리소서”라고 청했다. 이어 대제학 오원 역시 “당을 만드는 자는 역률(逆律)로 논해야 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영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론을 앞세워 당쟁을 일삼는 신하들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 놓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영조가 잘 조합해 다스리지 못했다고 한 당론(黨論)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앞서 밝혔듯이 영조는 경종 때 왕세제 대리청정과 임인옥사에 연루되어 사형당한 노론 4대신에 대해 정치적 빚이 있었다. 더욱이 이들에 대한 신원(伸寃)은 임인옥사의 사건 보고서인 ‘임인옥안(壬寅獄案)’에 역적의 수괴로 올라 있는 자신의 명예 회복과도 관계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영조는 일찍이 노론 4대신 중 조태채와 이건명을 신원 조치했지만, 이 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남은 2명, 즉 김창집과 이이명의 죄를 풀어주고 벼슬을 회복해 주었다. 그만큼 김창집과 이이명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조가 노론 4대신의 죄를 완전하게 벗겨주면서 경종 시절 노론의 정치 행동에 면죄부를 부여하자 당시 삼사(三司)를 장악하고 있던 노론이 소론의 대신들을 일제히 공격하고 나섰다. 이미 사망한 소론의 대신 유봉휘와 조태구의 관작을 추탈하고 소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이광좌를 파직하라고 주청한 것이다.

이렇듯 당론(黨論)을 앞세워 임금을 핍박하는 노론계 삼사(三司) 관료들을 제압할 뾰족할 대책을 찾을 수 없자 영조는 다시 ‘양위 카드’를 꺼내들었던 것이다.

여하튼 영조가 어떻게 행동할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신하들 앞에 때마침 대비의 수찰(手札)이 도착했다. 대비의 수찰(手札)이 도착했다는 것은 영조가 양위의 명을 거둘 수 있는 명분이 생겼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일단 안심했다. 더 이상의 혼란과 파국은 어느 누구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선위할 뜻을 거두라는 대비의 명에 영조는 못이기는 척 ‘임금의 짐을 벗겠다’는 명을 거두었고, 이에 신하들은 천세(千歲) 삼창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당시 그 자리에서 “이후 어찌 차마 당론(黨論)을 하겠습니까?”라는 신하들의 약속은 결코 지켜지지 않았고 지켜질 수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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