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예제도로 본 21세기 권력·자본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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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예제도로 본 21세기 권력·자본의 노예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4.11.17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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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추노>에 등장하는 노비.

고조선의 팔조금법에는 남자노예를 노(奴), 여자노예를 비(婢)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부여, 삼한도, 삼국시대를 거쳐 노비제도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사노비와 공노비로 구분했다.

고려는 종주국이라 믿은 원나라의 ‘동족을 노비로 부리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조롱 속에서도 노비제도를 혁파할 생각이 없었다.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랜 이민족의 지배체제에서 벗어나 건국한 명은 전통적인 노비제도를 혁파해 노비 신분을 당대로 제한하는 한편 고공(雇工), 즉 일종의 머슴제도로 전환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 세력은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숭상하면서도 노비제도만큼은 철저하게 고수했다. 노비세전법(奴婢世傳法)까지 만들어 천역을 세습화했던 것이다.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은 무려 1만여 명의 노비를 거느렸고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은 서울에 300여명, 시골에 수천 명의 노비가 있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353명의 노비가 있었고 윤선도 집안에는 700명이 넘는 노비가 있었다.

이같은 노비제도는 1894년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면서 철폐됐다.

신간 『조선노비열전』(유리창)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혹한 신분제도의 천형을 등에 지고 양반을 위해 평생 마소처럼 희생당해온 노비들에 대한 기록이다.

남아있는 기록의 한계로 인해 노비 개개인보다는 노비제도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지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천역을 벗어던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은 노비 제도 폐지를 극력 반대한 인물이다. 조헌(1544~1592년)은 서얼차별 폐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경세가였다. ‘16조소’라는 상소문에서 과부의 재혼을 막지 말고 서얼을 등용하며 노비를 줄여 병사로 선발하자는 등의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정조(1752~1800년)는 노비도 백성이라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노비들을 해방시킴으로써 조선의 국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1778년 노비추쇄도감을 폐지하는 한편 선두안(宣頭案, 내수사에서 보관하는 노비대장)을 통해 직접 노비문제를 파악했다.

1790년 완전한 노비제도 폐지 및 노비 신분상속 폐지라는 담대한 결정을 내렸지만 급서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다수 노비들이 운명에 순응하며 살았던 것과 달리 제도의 허점과 인간적인 정리 혹은 거센 저항을 통해 팔자를 바꾼 노비들의 이야기도 있다.

토목전문가라는 전문성으로 천역을 벗어던진 박자청은 조선 초기 경복궁과 주요 왕릉 공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서인의 제갈량으로 불리던 송익필은 정철의 후원으로 정치를 쥐락펴락했고 매창과의 로맨스로 알려진 시인 유희경은 상례전문가로 명성을 날렸다.

 

상전의 은덕으로 면천돼 고위 관직에 오른 반석평은 UN 사무총장 반기문의 선조인데 팔도감사를 지냈고 전장을 누비는 전령의 조상 정충신은 충효를 중시하는 유교 사회의 아량을 광고하는 모델로 이용됐다.

고귀한 공주 신분에서 관노로 추락한 경혜공주, 사노비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았던 현주 이구지 열전도 흥미롭다.

저자는 새삼스레 조선시대 노비제도를 살펴본 이유에 대해 “지금 이 나라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선거를 통해 정치 지도자를 뽑는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특권층만의 나라이며 대다수 국민은 권력의, 자본의, 서열의 노예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의 뿌리가 노비를 마소와 같은 재산으로 여기고 자자손손 세습시켜온 부끄러운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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