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대로 갈재·누릿재 등 선조들 삶이 담긴 ‘옛길’ 6개소 명승 지정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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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대로 갈재·누릿재 등 선조들 삶이 담긴 ‘옛길’ 6개소 명승 지정 예고
  • 이성태 기자
  • 승인 2021.09.1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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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대로 갈재. [문화재청 제공]
삼남대로 갈재.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삼남대로 갈재·누릿재, 관동대로 구질현, 창녕 남지 개비리, 백운산 칠족령, 울진 십이령 등 6개소의 옛길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16일 지정 예고했다.

옛길은 ‘예전부터 다니던 길’ 또는 ‘옛날에 존재했던 길’ 등의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명승으로 지정되는 옛길은 단순히 시간과 공간의 의미만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부단한 교감의 결과다.

또한 길에서 오랜 시간 축적돼 온 문화, 역사, 전통 등을 모두 포함하는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어 선조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과거 옛길은 고려 시대 통치의 목적으로 건설된 역로(驛路)로 조선 시대로 이어지면서 국가의 중요한 시설로 여겨졌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물자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이용이 빈번한 도로가 대로로 승격되며 9개 대로 체계가 완성됐다.

삼남대로, 관동대로, 영남대로, 의주대로 등의 간선도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했으며 점차 민간교역로의 기능을 맡게 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옛길이 신작로로 바뀌는 과정에서 길이 확장되고 가로수가 세워지면서 본래 모습을 잃었고 남은 옛길마저 후대에 임도(林道)로 사용되면서 훼손된 경우가 많아 오늘날 남아있는 옛길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으로 가는 길로, 삼례·전주·태인·정읍·나주·강진을 거쳐 해남의 이진항에서 제주에 이르는 약 970리 길을 말한다.

삼남대로 갈재는 고려 시대 현종이 나주로 몽진할 때 이용한 삼남대로의 대표적 고갯길로 『신증동국여지승람』, 『호남읍지』, 『동여도』 등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노령(蘆嶺), 갈령(葛嶺), 위령(葦嶺) 등으로 표시돼 있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구분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조선 시대 많은 문인이 이곳을 지났다는 기록을 통해 이곳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또한 송시열이 기사환국으로 사사되기 전 마지막 여정이 갈재였으며 동학농민군이 장성에서 대승을 거두고 곧바로 정읍으로 향하기 위해 갈재를 넘었다고 한다.

길 가운데 축대가 조성돼 마차와 사람들이 다녔던 경로가 구분되고 돌무지가 회전 교차로의 역할을 하는 등 과거 교역을 위해 활발히 이용됐던 옛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정읍과 장성을 연결하는 돌길, 흙길의 형태가 잘 남아있고 고갯길 정상에는 부사 홍병위 불망비가 위치하는 등 옛길을 따라 다양한 문화유산과 함께 주변에 참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등이 우거져 경관적 가치 또한 크다.

삼남대로 누릿재 역시 조선 시대 강진과 영암을 잇는 삼남대로의 중요한 고갯길로 『광여도』, 『강진군읍지』 등에 황치(黃峙)로 기록돼 있고 황현(黃峴)이라 불리기도 했다. 정약용, 최익현, 송시열, 김정희 등 많은 문사들의 방문기록이 내려오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특히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를 지내며 월출산과 누릿재를 여러 시와 글로 남기기도 했다.

조선 시대 강진, 해남, 제주 등지로 유배를 떠나는 경로였으며 반대로 강진, 해남 일대의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월출산을 넘어 강진으로 가는 길은 험하지만 거리가 짧은 누릿재와 상대적으로 낮은 고개를 넘어가는 불티재가 있었지만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누릿재를 주로 이용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근 주민들이 영암장, 나주장을 다니며 오래도록 지역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해왔다.

또한 옛길에서 보이는 월출산과 농촌경관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정상부 인근에 넓게 분포하는 서낭당 돌무더기 등이 남아 있어 다양한 옛길 문화를 보여주는 민속적 가치가 뛰어나다.

관동대로는 한양에서부터 양평·원주·강릉·삼척을 거쳐 울진 평해까지 약 885리에 이르는 도로다.

관동대로 구질현은 강원도에서 한양·수도권으로 향하는 관동대로의 일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질현(仇叱峴,)이라 기록돼 있으며 『광여도』에는 구존치(九存峙)로도 표기돼 있다. 지형이 험해 아홉 번은 쉬고 나서야 고개를 넘을 수 있다고 하여 구둔치라고 불리기도 했다.

길 주변에는 계단식 지형이나 습지가 형성된 것으로 보아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1940년대 중앙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에도 주민들은 양동면 시장이나 지평시내를 갈 때에 기찻삯을 아끼기 위해 또는 소나 말 등을 기차에 싣고 갈 수 없어 옛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창녕 남지 개비리는 박진(朴津)과 기강(歧江)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옛길로 소금과 젓갈을 등에 진 등짐장수와 인근 지역민들의 생활길로 애용됐으며 일제강점기 지형도에도 옛길의 경로가 기록돼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개비리는 ‘개가 다닌 절벽(비리)’ 또는 ‘강가(개) 절벽(비리)에 난 길’이라는 뜻으로 선조들은 과거 낙동강의 수위가 지금보다 높아 발아래에는 강물이 차오르고 아슬아슬한 벼랑길임에도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옛길에 올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신작로를 만들 때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사와 너비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덕에 옛길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벼랑길에서 조망되는 낙동강의 모습과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식생이 옛길과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명승지이다.

백운산 칠족령은 평창과 정선을 연결하는 대표적 고갯길로 순조 대 편찬된 『만기요람』에 동남쪽의 통로로 기록돼 있고 문희리(文希里)를 거쳐 동면내창(東面內倉)으로 가는 경로가 「평창군 오면 지도」에 구체적으로 표시돼 있다.

이곳은 동강(남한강 상류)에 이르는 최단 경로로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강을 통해 소백산 일대 금강송을 서울로 운송하던 떼꾼들이 애용했다고 전해지며 길을 따라 감입곡류를 이루는 동강의 빼어난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울진 십이령은 두천원(斗川院)을 기점으로 봉화 인근 내륙의 생산품과 울진 인근의 해산물을 교역하던 십이령의 일부로 샛재·바릿재 등 옛 십이령의 주요지점이 잘 남아있다. 십이령은 울진과 봉화에 걸쳐 위치한 12개의 큰 고개를 말하며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험준한 길로 사대부보다는 주로 상인들이 오가던 길이었다.

문화재청은 옛길 6개소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최종 지정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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