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자 느린 화살 이리저리 흩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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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자 느린 화살 이리저리 흩어지네”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4.03.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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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弓詩] 조선 선비, 활쏘기를 노래하다…③習射 將行大射禮
1743년(영조 19년) 윤4월7일 성균관에서 거행된 대사례에서 왕이 활을 쏘는 의례를 그린 어사례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43년(영조 19년) 윤4월7일 성균관에서 거행된 대사례에서 왕이 활을 쏘는 의례를 그린 어사례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六十年來始執弓 나이 육십이 되어 처음으로 활을 잡으니
才能不及賣油翁 재능이 기름 파는 노인보다 못할 수밖에
尋常只慣投壺樂 예사롭게 투호놀이에 익숙했을 뿐
剡注專無貫蝨功 염주로 서캐 꿰는 훈련 전혀 안 했지
日照張帿迷遠近 과녁에 해 비치니 원근이 헷갈리고
風吹緩矢散西東 바람 불자 느린 화살 이리저리 흩어지네
座中應有歐陽子 아마도 좌중에는 구양자가 있어
笑殺前身蕭宋公 전신인 소송공을 마음껏 놀려 대리. (『허백당보집』 제3권)

<활쏘기를 연습하다. 장차 대사례를 행하려 하였다(習射 將行大射禮)>는 제목의 시로 조선 초기 학자 성현(成俔·1439~1504년)이 썼다. 환갑의 나이에 처음 활을 잡고 활쏘기를 연습하는 고단함이 묻어난다.

‘재능이 기름 파는 노인보다 못할 수밖에’는 자신의 활쏘기가 매우 서툴다는 뜻이다. 송나라 문필가 구양수가 쓴 『귀전록(歸田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송나라 진요자(陳堯咨)는 활을 잘 쏘았는데 하루는 교외에서 활쏘는 것을 지나가던 기름 장수가 구경했다. 진요자가 자신의 활 솜씨가 어떠냐고 묻자 기름 장수는 숙련된 것일 뿐이라고 대답한 후 호롱 주둥이에 동전을 올리고 구멍으로 기름을 따랐는데 기름이 실처럼 흘러들어가서 동전에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염주(剡注)로 서캐 꿰는 훈련 전혀 안 했지’는 정신을 집중해 활쏘기 연습을 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염주는 『주례(周禮)』에 나오는 ‘오사(五射)’ 가운데 하나다. 즉 활쏘기에는 다섯 가지 절차가 있다. 첫째는 백시(白矢:흰 화살)로 과녁을 쏜 후에 흰 촉을 보는 것이다. 둘째는 참연(參連)으로 앞서 한 발을 쏘고 뒤에 세 발을 연속으로 쏘아 간다는 말이다. 셋째는 염주(剡注)로 깃의 머리는 높게 하고 살촉은 낮게 쏘아가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양척(襄尺)으로 양(襄)은 양보함이다. 임금과 신하가 함께 활을 쏠 때 감히 나란히 서서 쏘지 않으며 임금에게 한 발자국 양보하고 물러나야 한다. 다섯째는 정의(幷儀)라 화살 넷을 쏜 후에 우물 정자의 형태로 나타나는 의식이다.

‘서캐 꿰는 훈련’이란 『열자(列子)』 「탕문(湯問)」 편에 나오는 말로 서캐는 기생충 또는 이[蝨]의 알이다. 기창(紀昌)이라는 사람이 서캐를 잡아 창문 사이에 매달아 놓고 정신을 집중해 바라보았는데 날이 갈수록 크게 보이다가 3년 뒤에는 수레바퀴만 하게 보여 그때야 활을 당겨 서캐의 심장을 꿰뚫었던 일을 말한다.

구양자는 당나라의 구양순(歐陽詢)이고 소송공(蕭宋公)은 송국공(宋國公) 소우(蕭瑀)다. 중구일(重九日)에 왕이 신하들에게 활을 쏘게 하였는데 소우가 한 발도 맞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구양순이 시를 지어 놀리기를 “세찬 바람 불어와 느린 화살 날리는데 연약한 손을 올려 뻣뻣한 활을 쏘네. 높이 쏘려 하지만 화살 다시 떨어지고 서쪽으로 쏘려 해도 동쪽으로 날아가네”라고 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즉 구양순이 활을 못 쏘는 소우를 놀렸듯이 함께 활을 쏘는 이들이 자신을 소우처럼 놀려댈 것이라는 걱정이 묻어 있다.

이 시는 성현이 1499년(연산군 5년)을 전후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 즉위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대제학까지 겸임했던 그가 환갑의 나이에 익숙한 투호가 아니라 처음 활을 잡고 억지스럽게 연습까지 하며 이같은 시를 남긴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답은 <習射 將行大射禮>이란 제목에서 읽혀진다. 장래에 행해질 대사례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대사례는 중국 주나라 때 성행한 의식으로 국왕과 신하가 모여 활쏘기 시합을 하고 군신간의 예를 확인하는 행사였다. 조선시대에는 1477년(성종 8년) 성종 때 처음으로 시행됐고 1502년(연산 8년)과 1505년(연산 11년) 연산군 때 두 번, 1534년(중종 29년) 중종 때 한 번, 1743년(영조 19년)과 1764년(영조 40년) 영조 때 두 번 등 모두 여섯 차례 행해졌다.

이 가운데 성현이 환갑의 나이에 처음 활을 잡고 습사를 하며 준비했던 대사례는 1502년이다. 실제 대사례가 행해지기까지 2~3년이 남았지만 조정 관리들이 벌써부터 활쏘기 연습에 몰두했던 이유는 연산군의 어명이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특히 연산군 때 행해졌던 두 차례의 대사례는 모두 사화(士禍) 이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김종직 일파가 실록의 사초 문제로 숙청당한 조선 최초의 사화인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난 지 4년 만에 첫 번째 대사례가 행해졌고 두 번째 대사례도 연산군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돼 많은 선비가 숙청된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1년 뒤에 행해졌다.

‘장차 대사례를 행하려 하였다’고 한 성현의 시 제목에서 유추해 보면 연산군은 첫 번째 대사례도 무오사화 직후 거행하려 했지만 활쏘기보다는 투호놀이를 즐겨했던 조정 관료들에게 강압적으로 활쏘기를 배워 빠짐없이 대사례에 참가하도록 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1505년 9월13일 두 번째 대사례를 한 달여 앞두고 팔이 아파 대사례에 참가할 수 없다는 호조참의 권구(權俱)가 참대시(斬待時)를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참대시는 참형(斬刑)에 처한 사람의 죄가 대역죄나 강상죄가 아닌 경우 만물이 자라는 시기인 봄에서 가을을 피해 형을 집행한 것으로 말한다.

대사례의 시사관(侍射官)에 이름이 올라간 권구는 8월1일 팔이 아프다는 이유로 시사관 면제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연산군은 “대사례는 덕(德)만을 보는 것이요, 그 기예를 겨루는 것이 아니므로 늙은 재상들도 모두 활 쏘는 반열에 참여한다. 구(권구)가 잘 쏘지는 못할지라도 약한 활로 예(禮)를 이루기는 본디 어려운 일이 아니거늘 감히 사면을 청하였으니, 이는 명을 거스름이며 승지 윤순(尹珣)이 전계(轉啓)한 것도 옳지 않으니 모두 국문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 『연산군일기』 59권(연산 11년 8월1일 첫 번째 기사)에 기록돼 있다.

이어 이틀 뒤인 8월3일 첫 번째 기사에는 “의금부가 호조참의 권구, 내관 김중산이 명을 거슬려 활을 쏘지 않은 죄를 모두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에 의하여 참대시(斬待時)로 조계(照啓)하니 그대로 좇았다”며 참형을 확정한 내용도 확인된다.

즉 ‘명을 거슬려 활을 쏘지 않은 죄’를 지은 권구에게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이란 죄명을 씌워 의금부에서 참대시(斬待時) 처벌을 건의했고 연산군이 그대로 시행하라고 명했다는 내용이다. 기훼제서율은 임금이 발행한 문서를 버리거나 훼손한 자에게 참형에서 장(杖) 100대 사이의 벌을 과하던 형벌이다.

군신간의 예를 확인하고 상하 친목을 도모하는 행사였던 대사례가 일방적인 복종과 충성을 맹세하고 이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변질됐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특히 연산군에게 대사례는 어느 누구도 왕명을 거역하지 못하는 왕권 강화라는 차원의 정치적 도구로 역할을 했다.

성현의 시에서도 사화의 배경이 어찌됐든 사림파에 대한 무자비한 피의 숙청이 일어난 직후 늙은 재상들까지 활쏘기를 배워 대사례에 참가하도록 강제한 연산군의 서슬퍼런 어명에 환갑의 나이에 느껴야 했던 무기력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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