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고 보잘 것 없는 이야기가 특별하고 새로운 글이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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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고 보잘 것 없는 이야기가 특별하고 새로운 글이 되는 이유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6.24 0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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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⑦ 평범과 일상의 미학⑧
▲ 박지원을 찾아온 소천암은 겉모양은 아름답지만 그 속은 텅 비어 있는 사물로 거여(유밀과)를 예로 들며 문장의 길을 물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⑦ 평범과 일상의 미학⑧

[한정주=역사평론가] 우리 주변의 하찮고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서 글감을 찾아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담아내는데 능수능란한 재주를 지녔던 박지원의 글 가운데 또 하나 필자가 주목하는 글은 ‘순패서(旬稗序)’이다.

여기에서 박지원은 소천암이라는 이가 ‘백성들의 일상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피고, 누추하고 구석진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으고, 보통 사람들의 아주 천박하고 사소한 우스갯소리를 엮어서’ 『순패(旬稗)』라고 이름붙인 책에 서문(序文)을 써주면서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습 하나까지 실제 눈앞에서 일어난 듯 쓰고, 눈이 아리도록 보고 실컷 들어서 무식한 사람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일들이지만 “묵은 장이라도 그릇을 바꿔 담으면 입안에 감도는 맛이 새롭듯 항상 보아 온 모습이나 들어 온 이야기도 장소가 달라지면 그것을 보는 마음과 눈 또한 옮겨간다”고 비평했다.

“소천암이 전국의 민요와 민속 그리고 방언과 놀이 등을 두루 기록했다. 심지어 종이연에도 계보를 만들고 어린아이들이 하는 수수께끼까지 설명해 놓았다.

백성들의 삶 구석구석을 들춰 익히 보아온 모습들은 물론 요염하게 정을 내뿜으며 문에 기댄 채 아양을 떠는 여인네, 칼을 두드리고 손뼉을 치면서 맹세를 하는 남정네 등 민가의 일상을 모두 수집해 실어놓고 각각의 내용들을 조목별로 나누어 잘 엮어 놓았다.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것도 그 형상을 붓으로 잘 그려냈고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곳까지도 책을 펼쳐 보면 볼 수 있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와 벌레가 움직이고 굼벵이가 꿈틀거리는 모습 역시 실제 소리나 모양과 다름없이 표현했다. 이것을 십간(十干: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순서대로 배치하고 『순패(旬稗)』라고 이름 붙였다.

어느 날 소천암이 소매에 책을 넣고 와서 내게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내가 어렸을 때 손장난 삼아 지은 것이네. 그대는 음식 중에서 거여(유밀과)를 본 적이 없는가? 먼저 찹쌀가루를 만들고 술에 적셔 누에 모양의 크기로 잘라 더운 온돌방에서 말린 후에 기름에 튀기네. 그러면 부풀어 올라 누에고치처럼 된다네. 그 모양이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답네.

그러나 과자 속은 텅 비어 있어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잘 부서져 불면 눈처럼 날아가네. 이 때문에 겉모양은 아름답지만 그 속은 텅 비어 있는 사물을 두고 ‘거여’라고 한다네.

반면 개암과 밤 그리고 벼는 세상 사람들이 하잘 것 없다면서 천하게 여기지만 실제는 아름답고 먹으면 참으로 배가 부르네. 또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물로도 사용할 수 있고 귀한 손님에게 예물로 드릴 수도 있네.

문장의 길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개암, 밤, 벼를 하찮게 생각하니 그대가 나를 위해 옳고 그름을 가려 줄 수 없겠는가?’

그래서 나는 소천암의 『순패』를 다 읽고 난 후 그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장자가 꿈에 나비로 변했다는 말은 믿을 만하네. 그러나 한나라의 장수 이광의 화살이 바위를 꿰뚫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믿기 어렵네. 꿈은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어렵지만 눈앞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네.

지금 그대는 백성들의 일상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살피고 누추하고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았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아주 천박하고 사소한 우스갯소리나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습 하나까지 실제 눈앞에서 일어난 듯 기록했네. 눈이 아리도록 보고 실컷 들어서 무식한 사람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들이네.

묵은 장이라도 그릇을 바꿔 담으면 입안에 감도는 맛이 새롭듯 항상 보아온 모습이나 들어온 이야기도 장소가 달라지면 그것을 보는 마음과 눈 또한 옮겨가네.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구태여 소천암이 어떤 사람이고, 그곳에 실려 있는 민요가 어느 지방의 민요인지 물어 보지 않고도 곧바로 알 수 있을 것이네.

이 책에다가 음운을 달아 연이어 읽게 하면 백성들의 본성과 감정에 대해 의논할 수 있고 계보를 살펴 그림을 그리면 수염까지도 밝힐 수 있을 것이네.’” 박지원, 『연암집』, ‘순패 서문(旬稗序)’ (박지원 지음, 김명호‧신호열 옮김,《연암집》, 돌베개, 2007. 인용)

박지원의 이 글이야말로 필자가 주장한 “주변의 하찮고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조차 글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는 ‘평범(平凡)’과 ‘일상(日常)’의 미학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즉 우리가 항상 보아온 모습이나 들어온 이야기도 누가 어떻게 글로 쓰느냐에 따라 아주 특별하고 전혀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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