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회경제 개혁의 길라잡이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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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회경제 개혁의 길라잡이 『열하일기』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0.26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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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북학과 중상주의 경제학의 리더 박지원(朴趾源)②
▲ 박지원의 『열하일기』 표지(왼쪽)와 지난 2006년 새로 발견된 우리말 번역 필사본 본문.

[조선의 경제학자들] 북학과 중상주의 경제학의 리더 박지원(朴趾源)②

[한정주=역사평론가] 박지원이 조선의 사회경제를 개혁할 방책으로 ‘북학’에 뜻을 두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1780년 청나라에 다녀온 후부터였을까?

그가 북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시점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지원은 과거를 통한 정치적 출세의 뜻을 완전히 접은 1771년(35세) 이후 은둔하다시피 한 채 오직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과 더불어 ‘이용후생의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이때 박지원이 연구하고 토론한 학문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북학, 곧 청나라의 선진 문명과 과학기술이었다. 특히 박지원은 자신보다 여섯 살 연상인 벗 홍대용을 통해 북학의 큰 뜻을 더욱 다듬을 수 있었다.

홍대용은 이미 숙부인 홍억을 수행해 1765년(영조 41년)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청나라를 다녀온 경험을 살려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이라는 저서까지 썼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실제 홍대용의 적극적인 주선과 추천으로 이들 연암 그룹의 일부 멤버들은 차례차례 청나라를 견학할 기회를 갖게 된다.

1778년 박제가와 이덕무가 그렇고, 1780년 박지원의 연행길도 그랬다. 따라서 이들 연암 그룹 멤버들의 연행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일찍이 자신들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연구한 북학의 큰 뜻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박지원은 “비 내리는 지붕 아래 눈 오는 처마 밑에서 연구하고, 술기운이 거나하고 등심지가 가물거릴 때까지 맞장구를 치면서 토론하던 내용을 한번 눈으로 확인할” 목적으로 마침내 1780년 5월 삼종형(三從兄: 팔촌형)인 금성위 박명원의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 연행 길에 오른다.

그리고 한양을 출발해 요동 벌판을 거쳐 북경과 열하에 이르러 다시 귀국하는 약 5개월간(5월25일부터 10월27일까지)의 연행길을 귀국한 후 기록으로 남긴 것이 그 유명한 『열하일기』다.

『열하일기』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화려한 수식어를 많이 갖고 있다. 『양반전』, 『호질』, 『허생전』 등과 같은 고전 소설의 걸작들을 숱하게 담고 있는 탓에 ‘우리나라 고전 문학의 백미’라고 일컬어지기도 하고, 또 『을병연행록』(홍대용), 『노가재연행록』(김창업)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연행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열하일기』를 여행 견문록 혹은 고전문학의 걸작으로만 읽는다면 박지원이 그곳에 담은 북학의 큰 뜻, 즉 조선의 사회경제체제를 크게 한번 개혁해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청나라 수준으로까지 발전시키려고 한 사상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지원 자신도 『열하일기』가 단순한 여행 기록이나 이야기책이 아닌 ‘이용후생의 학문’을 담은 사회경제서(社會經濟書)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물며 그 이치를 논할 때에도 어찌 황홀히 헛된 이야기만 늘어놓는데 그쳤겠는가. 그리고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城郭)이나 건물, 경작과 목축이나 공업(工業) 등 일체 이용후생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박지원, 『열하일기』 ‘서문’ 중에서

박지원의 청나라 연행 길은 이처럼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조선의 경제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고 조선 사람들의 경제활동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관한 큰 방향과 더불어 구체적인 방법을 몸소 보고 배우는 현장이었다.

이 현장 체험을 귀국 후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고스란히 담아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혔다.

예를 들어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에서 가장 볼만한 장관이 광활한 영토나 아름다운 산수 혹은 화려한 누각이나 거대한 성곽이 아니라 ‘깨어진 기와조각과 똥 부스러기’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었던 까닭 역시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깨어진 기와조각과 똥 부스러기조차 함부로 다루지 않고 이용할 줄 아는 청나라의 기술과 풍속을 배우는 일이야말로 조선의 경제와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박지원은 일찍이 연암 그룹의 제자들과 함께 품어 온 북학의 큰 뜻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청나라 연행 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온갖 ‘이용후생의 방법’과 ‘사회경제 개혁의 구상’들을 귀국 후 『열하일기』에 담았다.

따라서 『열하일기』에는 박지원의 사회경제사상, 즉 그가 품은 조선의 사회경제 개혁의 길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열하일기』를 여행 견문록이나 고전 문학의 걸작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 사상서로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그것은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밝히고자 한 북학의 큰 뜻, 즉 조선을 초강대국 청나라와 어깨를 견줄만한 부국(富國)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비전과 포부를 오늘날 우리들이 받아 안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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