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土亭) 이지함② 300년 후 조선 사대부의 근대화 방향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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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土亭) 이지함② 300년 후 조선 사대부의 근대화 방향 제시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09.30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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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⑰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지함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자유롭게 사는 삶을 추구했다. 그와 절친했던 율곡은 이지함이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고 구속받지 않은 채 제멋대로 사는 것을 좋아했다고 했다.

한번은 율곡이 이지함의 자질이 아까워 성리학(性理學)에 종사할 것을 권한 적이 있다. 그러자 이지함은 “나는 욕망이 많아 성리학을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에 율곡이 “그대는 명예나 이익 그리고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데 무슨 욕망이 있어서 학문에 방해가 되겠소?”라고 했다. 이지함은 담담히 “어찌 그것만이 욕망이겠는가. 마음이 가는 곳이 천하의 진리나 이치에 있지 않다면 모두 욕망인 것이다. 나는 스스로 마음대로 사는 것을 좋아하여 규칙으로 단속할 수 없다. 이 또한 물욕(物欲)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이 대화를 통해 보건대 이지함은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심성 수양을 통해 이것을 통제하려고 했던 율곡과 같은 정통 성리학자들과는 다르게 욕망을 인간 본연의 것으로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성리학에 종사하는 사대부를 도덕군자(道德君子)로 추앙하고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이나 장사꾼을 물질적 이익만을 좇는 소인배(小人輩) 취급하던 당시의 사회 질서나 풍속에 정면으로 맞서며 양반 사대부일지라도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마땅히 재물(財物)과 재용(財用)에 힘쓰고 몸소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독특한 철학의 소유자가 이지함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이지함은 유학의 종조(宗祖)인 목은(牧隱) 이색의 6대손으로 양반 사대부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명문가의 출신이었지만 평생을 포의(布衣)로 지내며 성리학의 족쇄나 사회의 인습에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 충남 보령시 청라면의 화암서원. 이지함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그러다가 1573년 나이 57세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고 다음해에 6품직을 제수 받아 포천현감으로 나갔다. 이때 이지함은 포천현감으로 부임하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그의 독창적인 사회경제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본말상보론(本末相補論)’과 ‘삼대부고론(三大府庫論)’을 상세하게 밝히면서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위해서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과 광업을 적극 장려할 것을 건의했다.

명리(名利)나 현달(顯達) 따위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던 그가 뒤늦게 벼슬길에 나간 이유 역시 평생 자신이 추구한 사회경제론과 정책의 시행을 임금에게 건의하고 목민관으로 직접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본말상보론’은 본업(本業)인 농업과 말업(末業)인 상공업의 어느 한쪽도 폐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말업으로 본업을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개 덕(德)이라는 것은 근본이라고 할 수 있고, 재물(財物)이라는 것은 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과 말단은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말단을 제어하고 말단으로 근본을 보충한 다음에야 사람의 도리가 궁색하지 않게 됩니다. 재물을 생산하는 도리 역시 근본과 말단이 있습니다. 곡식을 생산하는 농업이 근본이라면 소금을 굽거나 철을 주조하는 일은 말단입니다. 그래서 근본인 농업으로 말단인 상공업을 제어하고 말업인 상공업으로 근본인 농업을 보충한 연후에야 모든 재용(財用)이 궁핍하지 않게 됩니다.” 『토정유고(土亭遺稿)』, ‘포천현에 부임할 때 올린 상소(莅抱川時上疏)’

또한 ‘삼대부고론’은 상책(上策)을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을 올바르게 하는 ‘도덕지부고(道德之府庫)’로 보고 중책(中策)을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대해를 이루듯이 어질고 현명한 인재들을 모아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인재지부고(人才之府庫)’로 보고 하책(下策)을 땅과 바다를 이용해 온갖 재물을 생산하는 ‘백용지부고(百用之府庫)’로 본 다음 현실적으로 상책인 ‘도덕지부고’나 중책인 ‘인재지부고’는 열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하책인 ‘백용지부고’는 임금과 사대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서울 마포구 용강동 토정로의 이지함 집터 푯말.

특히 ‘도덕지부고’나 ‘인재지부고’가 이전 시대나 당대의 여러 학자나 정치가들이 주장한 내용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한 반면 ‘백용지부고’는 이지함만의 독창적인 사회경제사상이었다.

다시 말해 ‘도덕지부고’나 ‘인재지부고’는 상소문의 격식에 맞추어 적은 내용이고 실제 이지함이 상소문을 통해 임금에게 적극 건의하고 싶었던 개혁정책은 ‘백용지부고’였다고 하겠다.

‘재용지부고’가 비록 하책이지만 성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권도(權道)라고 한 상소문의 내용만 보아도 이지함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땅과 바다는 백 가지 재용을 간직하고 있는 창고입니다. 이것은 형이하(形以下)적인 것이지만 여기에 도움을 받지 않고서 능히 국가를 다스린 사람은 없습니다. 진실로 이것을 능숙하게 개발한다면 그 이로움과 혜택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질 것입니다. 그러하니 어찌 그 끝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곡식을 생산하고 나무를 심는 일이 진실로 백성이 살아가는 근본이라면 또한 은(銀)은 가히 주조해야 하고, 옥(玉)은 가히 채굴해야 하고, 고기는 가히 잡아야 하고, 소금은 가히 구워야 합니다. 사사로이 경영하고 이익을 좋아하며 가득 찬 것을 탐하고 베푸는 것에 인색함은 비록 소인(小人)들이 기뻐하는 바이고 군자는 달갑게 여기지 않는 바이지만, 마땅히 취할 것을 취해 모든 백성을 구제하는 일 또한 바로 성인(聖人)이 행해야 할 권도(權道)입니다.” 『토정유고』, ‘포천현에 부임할 때 올린 상소’

당시 이지함은 자신의 사회경제사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주인 없는 섬인 전라도의 양초도와 황해도의 초도를 임시로 포천현에 소속시켜 관청과 민간이 협력하여 어업과 상업 활동을 시행한다면 나라의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한편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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