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우리 마음 속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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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우리 마음 속 ‘괴물’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4.01.1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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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⑲ 허먼 멜빌 『모비 딕』…누구나 마음속 ‘괴물’과 싸운다Ⅱ

[한정주=고전연구가] 에이해브 선장은 왜 모비 딕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에이해브 선장은 그의 한쪽 다리를 빼앗아 간 게 혹시 거대한 흰고래 ‘모비 딕’이냐는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질문에 마치 “비탄에 빠진 사슴처럼 동물적인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이렇게 답한다.

“그래 스타벅. 그리고 모두 잘 들어주기 바란다. 내 돛대를 앗아간 녀석은 바로 모비 딕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의지하고 서 있는 이 죽은 다리를 가져다준 놈도 모비 딕이었다. 그래, 그래. 나를 파괴하여 영원히 의족에 의지하는 가엾은 신세로 만든 건 바로 그 가증스러운 흰 고래였다!”(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비 딕』, 작가정신, 2011, p215)

그런데 오직 돈벌이를 목적으로 포경선에 오른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모비 딕을 향한 에이해브 선장의 개인적 집착과 복수에 동참하기를 거부한다. 복수에 성공한다고 해도 고래기름을 몇 통이나 얻을 수 있을 뿐 낸터컷 시장에서는 그다지 큰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은 스타벅의 반항을 두 번 다시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자신의 복수는 “막대한 프리미엄을 가져다줄 가치가 있다!”고 선언한다. 그 순간 모비 딕이라는 존재가 에이해브 선장에게 어떤 의미인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내게는 그 흰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 녀석은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괴롭히고 있어. 나는 녀석한테서 잔인무도한 힘을 보고, 그 힘을 더욱 북돋우는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 흰고래가 앞잡이든 주역이든, 나는 그 증오를 녀석에게 터뜨릴 거야.”(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비 딕』, 작가정신, 2011, p217)

에이해브 선장에게 모비 딕은 단지 자신의 육신 중 일부인 한쪽 다리를 빼앗아 간 존재가 아니다. 모비 딕은 에이해브 선장의 영혼에까지 들어와 자기 멋대로 잔인무도한 힘과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휘두르며 괴롭히는 존재이다.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에까지 상처를 입혀서 에이해브를 지배하고 파괴하는 존재가 바로 모비 딕이다.

모비 딕의 잔인무도한 힘과 헤아릴 수 없는 악의는 에이해브 선장의 육신에 상처를 남기고 영혼마저 지배하고 있다. 모비 딕은 평생 고래를 추적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불굴의 고래잡이 베테랑 에이해브 선장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긴 ‘괴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 마음 안의 이 ‘괴물’은 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잊을 수 없는 존재, 벗어나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아무리 몰아내려고 해도 몰아낼 수 없는 끔찍한 존재이다.

과거에 경험한 고통, 절망, 공포, 슬픔의 충격으로 인해 마음 안에 만들어진 ‘괴물’이 현실의 삶에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해 자기 멋대로 우리를 괴롭히고 지배하며 파괴하는 경우 우리는 이 끔찍한 마음속 괴물을 가리켜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자신의 한쪽 다리를 먹어치운 그 순간부터 모비 딕이라는 존재는 에이해브 선장에게 단순히 거대한 흰고래가 아니라 자기 마음 안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끔찍한 괴물이 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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