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梅月堂) 김시습③ 동봉(東峯)…자호로 삼은 수락산 만장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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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梅月堂) 김시습③ 동봉(東峯)…자호로 삼은 수락산 만장봉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9.02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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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⑬

 

▲ 강원도 강릉의 매월당기념관. <사진:강릉시청 공식블로그>

[한정주=역사평론가] 앞서 밝혔듯이 조선의 산천(山川)치고 김시습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김시습은 산수를 방랑하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 시를 읊조리는 삶을 즐겼던 자신의 취향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호탕하여 명리(名利)를 즐거워하지 않고 생업(生業)을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청빈(淸貧)하게 뜻을 지키는 것을 마음에 품고 평소 산수(山水)를 방랑하면서 우연히 좋은 경치를 만나는 대로 시를 읊조리고 노닐었다.

일찍이 과거공부를 하는 거자(擧子)였을 때 친구들이 지나가다가 종이와 붓을 가져와서 다시 과거시험 볼 것을 힘써 권유했지만 오히려 마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감개(感慨)한 일(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을 만나게 되자 ‘사내로 이 세상에 태어나 도(道)를 행할 만한데 몸만 깨끗하게 하는 것은 인륜을 어지럽히는 부끄러운 짓이다. 그러나 만약 도(道)를 행할 수 없다면 홀로 그 몸을 선(善)하게 하는 것이 옳다’라고 생각했다.

둥둥 사물 바깥에 떠다니며 송(宋)나라 때 선술(仙術)을 수련한 도남(圖南)이나 천하를 유랑한 사막(思邈)의 풍모를 우러러 사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풍속에는 또한 이와 같은 일이 드물어 오히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홀연히 만약 옷을 검게 물들여 입고 산(山) 사람이 된다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마침내 송도(松都)를 향해 나아가 고성(古城)에 올라 보고 촌락을 배회했다.” 『매월당집』, ‘호탕하게 관서 지방을 유람한 기록 뒤에 쓴다(宕遊關西錄後志)’

이때부터 김시습은 관서(關西)지방의 천마산·성거산·묘향산에서부터 관동(關東)지방의 금강산·오대산·설악산은 물론 한양 도성 부근의 소요산·삼각산·도봉산·수락산과 호남(湖南)지방의 능가산·진산·무등산·조계산, 영남(嶺南)지방의 금오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山)을 두루 돌아다녔다.

특히 산을 좋아해 산(山) 사람으로 살기를 소망했고 산중 생활을 즐거워했던 김시습은 수많은 ‘산중 시’를 남겨 자신의 유별난 ‘산사랑’을 과시했다.

“산속 운수향(雲水鄕)은 더러운 세상과 멀리 있어 / 비록 오는 사람 있어도 세상 사람 아니네 / 평상에 가득한 흰 구름 한가로워도 쓸지 않고 / 작은 뜰에 돋은 풀 스스로 푸른 봄이네.

백지산(栢旨山) 앞산과 물빛 / 천고(千古)를 노래하고 읊조려도 오히려 사람 없네 / 내가 와서 한번 구경하니 새로운 뜻이 일어나 / 구름과 달도 기뻐하며 나를 책망하지 않네.

한번 산에 사니 세상 생각 멀어지고 / 이 생애 일 없이 보내며 사네 / 해 저물어 계곡 길로 사람 돌아가는데 / 여러 조각 흰 구름 초려(草廬)를 봉(封)하였네.

바람 맑고 달 밝은데 누구에게 기대어 구경하나 / 물의 모양 구름 형용 단지 저절로 알 뿐이네 / 계곡 가에 늦게 오니 산 비 지나가는데 / 노란 꾀꼬리 소리 말라비틀어진 오동나무 가지에서 나네.

객(客)은 드물고 산은 적막해 시끄러운 소리 없지만 / 땅은 궁벽하고 푸른 이끼 돌다리를 덮었네 /『남화경(南華經)』다 읽고 나서 도로 책을 덮자 / 까닭 모를 산 비가 파초를 때리네.

작은 누각에 바람이 가득하니 여름도 가을인 듯 / 나무 그림자 솔 그늘이 사면에 빽빽하네 / 하루 종일 누워서 노는 건 오직 나 혼자 / 세상사람 일 많아 와서 놀지 못한다네.”
『매월당집』, ‘산중에서 멋대로 읊다(山中雜吟)’

그런데 조선의 수많은 산 중에서 김시습이 남달리 마음을 주고 오랜 세월 거처로 삼은 곳은 금오산(金鰲山)과 수락산(水落山) 뿐이었다.

 

 

김시습은 31세(1465년. 세조 11년) 때 경주 금오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거처하였다. 이곳에서 7여년을 거처하는 동안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지었다.

이 책에서 김시습은 고루하고 편벽한 당시의 유학자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용궁·천상·저승·귀신 등을 소재로 삼아 신비롭고 기이한 세계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보였다. 그의 자유분방한 정신세계와 괴벽한 행적이 낳은 기이하고 독특한 창작물이 바로 『금오신화』였다.

그러나 김시습이 정말로 사랑했던 산은 수락산이었다. 이것은 그가 수락산 동쪽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峰)을 애호(愛好)하여 ‘동봉(東峯)’이라 부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호를 ‘동봉(東峯)’으로 한 사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김시습은 처음 수락산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운둔하기로 결심한 배경을 금오산에서 지낼 때 지은 시들을 모아 엮은 「유금오록(遊金鰲錄)」의 끝부분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금오산에 거처한 뒤로 멀리 유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차가운 기운 속에서 질병이 잇달아 발생했다. 다만 바닷가에서 하는 일 없이 한가롭게 지내며 시골 장터에서 거리낌 없이 놀다가 매화를 찾고 대나무를 물어 항상 시를 읊조리고 취해 스스로 즐거웠다.

신묘년(辛卯年 : 1471년. 성종 2년) 봄에 서울에 와달라는 청을 따라 한양에 들어갔다가 임진년(壬辰年 : 1472년. 성종 3년) 가을에 도성(都城) 동쪽의 폭천정사(瀑泉亭舍)에 은둔해 터를 잡고 집을 지어 일생을 마칠 마음을 먹었다. 계사년(癸巳年 : 1473년. 성종 4년) 봄에 쓴다.” 『매월당집』, ‘유금오록(遊金鰲錄)’

수락산은 한양 도성에서 동쪽으로 30리 쯤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산은 삼각산(三角山 : 북한산)과 도봉산(道峯山)과 정족(鼎足 : 솥발)의 형세를 이루고 있다. 비록 깎아지른 듯한 산세는 삼각산과 도봉산보다 못하지만 수석(水石)의 아취는 두 산보다 더 빼어나다. 수락산이라는 이름 또한 이 때문에 얻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김시습은 수락산 폭천(瀑泉) 부근에 폭천정사(瀑泉亭舍)라 이름붙인 거처를 짓고 직접 농사를 일구며 살았다. 그리고 이곳에 유가(儒家)와 불가(佛家) 그리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 등 5000여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뒤적이며 지냈다.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따뜻한 햇볕 아래 누워 한가롭게 낮잠 자는 것을 즐겼다.

또한 김시습은 자신의 호로 삼았던 ‘동봉(東峯)’, 즉 수락산의 만장봉에 자신의 다른 호인 ‘매월당(梅月堂)’이라는 이름을 붙인 처소를 짓고 거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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